[Story]2014. 10. 18. 22:30

# 회사 사보글 청탁을 받고 작성한 글입니다. 지면으로 인쇄된 제 글을 읽자니 꽤 어색하더군요. 언젠가, 바로 아래의 사진에 관련된 글을 3개는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두번째 글입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써온 글들에 들어간 이야기들이 좀 식상하기도 하고, 회사 사보글로 "주제"를 받아 작성한 글이라 좀 교훈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포스팅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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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구를 보고 나는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언어이니까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나의 비밀을 이제는 말해볼까 합니다.

유럽의 겨울이 끝나갈 무렵 달콤하고 기름진 과자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Ash Wednesday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사순절 동안 금욕의 시간을 맞이하기 전에 모두가 카니발을 즐기는 그 때이지요. 저도 스위스의 한겨울을 온몸으로 견디고 나서, 카니발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날의 경험은 강렬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지도 모르게 고요하던 도시가 한순간 시끌벅적해지고 길에서 만난 동양여자인 저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있던 도시는 동양인이 거의 없어서 평소 길을 걸어가면 다들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었습니다. 독일에 살던 친구가 딱 지금만 먹을 수 있으니 먹어두라고 했던 그 카니발의 과자는 사실 기름에 튀긴 과자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법이 풀려버린 것처럼 다시 고요해지고 사람들의 단순한 삶이 시작됩니다. 물론 그 기름진 과자도 자취를 감춥니다.

갑자기 고요해진 도시처럼 13년 2월 10일 설날 오후 3시에 나도 밀가루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설날연휴동안 많은 기름진 것들을 먹었으니 카니발이 끝나듯이 나도 불현듯 밀가루를 끊기로 그냥 마음 먹었습니다.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해외여행이나 출장기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밀가루를 먹지 않고 있습니다.

밀가루 단식의 좋은 점도 있지만 당연히 불편한 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점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같이 할 때 “밀가루를 끊은 저 사람과는 무엇을 먹을 수 있나?”하는 압박은 사실 소소한 정도입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도 리조또를 먹거나 샐러드를 먹으면 되니까요. 베지테리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섭취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밀가루 단식자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압박은 늘 심리적인 것이지요. “저 사람이 밀가루를 끊었으니 나도 밀가루를 끊어야 하나”하는 웰빙에 대한 압박 말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면 느끼는 그 “잘 사는 삶”에 대한 부담을 본의 아니게 밀가루를 끊은 나를 만나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는 밀가루 단식을 권하지 않습니다. 저는 밀가루 단식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의외로 자주 그리고 많이 밀가루를 섭취하고 있습니다. 빵이나 면, 햄버거나 피자, 과자 등 우리는 자발적으로 밀가루 메뉴를 선택하여 먹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먹고 있는 어묵에도 트윅스에도 프링글스에도 시리얼에도 밀가루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밀로 만드는 맥주도 마시면 안 됩니다. 끊고 보니 우리는 밀가루를 선택하여 살아온 것이 아니고,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밀가루 단식이란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삶 자체가 바뀌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간단히 칼로리발란스로 끼니를 때울 수도 없고, 동료들과 프라이드치킨을 나누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내게 “내일부터 밀가루를 끊어볼까”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아니요, 하지 마세요. 정 하겠다면 빵이나 면, 피자나 햄버거 중에 하나만 먼저 끊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어제도 내게 “내일부터 다 끊어볼까?”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이 이 글을 읽고, 혹은 나를 보고 밀가루 단식 실행을 고려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실패했습니다. 외부에서 강제되어진 의지는 도약으로 이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웰빙에 대한 목적을 정했다 해도, 반드시 밀가루 단식이어야 하지도 않고, 디톡스나 간헐적 단식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의 길은 모두 다르니까요.

다만, 결단이 필요한 일이지요. 매일 양치를 하듯이, 매일밤 잠을 청하듯이, 밀가루를 끊는 일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결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심사숙고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비밀입니다. 내부에서의 결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순간, 즉 결단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게 된다면 삶은 이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스스로 결단하여 혼자서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타인인 내가 권하거나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결심하고 실행해야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한걸음은 당신을 좋은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랜만에 더듬더듬 번역한 헤르만 헤세의 시 한 편을 덧붙이며, 당신의 결단을, 도약을, 변화를 응원합니다.



혼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길들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당신은 말을 타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고,

둘 혹은 셋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지막 한 걸음을

당신은 혼자서 가야만 합니다.


모든 어려운 것들을

혼자서 하는 것 외에는

잘할 수 있는 어떤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4. 27. 22:57





'타인의 삶'이 재개봉했을 때도 시간을 맞추지 못해 보지 못하다가, OTA 서비스('hoppin')의 도움으로 휴대폰 화면으로나마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문학을 공부하면 역사/문화/문화사를 함께 공부하게 되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늘 주목했던 시간 중 하나는 동독의 시간이었다. '책읽어주는 남자'(영화는 The Reader로 개봉되었던)의 한나의 이야기로 대변되는 동독의 시간. 이후로도 많은 작품들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동독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터널과 같은 그 어두운 시간들.





타인의 삶 (2013)

The Lives of Others 
9.4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출연
울리히 뮈헤, 세바스티안 코치, 마르티나 게덱, 울리히 터커, 토마스 디엠
정보
드라마, 스릴러 | 독일 | 137 분 | 201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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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도 동독의 시간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예술가의 시간이 아니다, 비밀경찰의 시간이다. 비밀경찰의 어두운 시간에 아슬아슬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시간들의 이야기이다. 그 단초는 브레히트의 시이다.







9월 푸른 빛 달이 뜨던 그날

자두나무 아래서

그녀를 안았네

조용하고 창백한 나의 그녀를

마치 아름다운 꽃처럼

우리 머리 위로 펼쳐진

여름 하늘

구름이 내 눈길을 사로잡네

하늘 높이 떠있는

하얗디 하얀 구름

눈길을 돌렸을 때

그곳에 없었네.




시의 1연을 주인공이 소리내어 읽는다. 주인공의 눈빛과 영혼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주인공의 외로움이 보여지고 인생의 단조로움이 보여지고, 우직하고 충직하기에 더 섬세하게 흔들리게 되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면서도 감동을 준다. 예술이 주는 위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가가 연주하게 되는 'Sonate vom guten Menschen'(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도청장치를 통해 들으며 주인공은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비밀경찰이 예술의 비밀조력자가 되는 순간이다.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진정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동독이 무너지고, 비밀조력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서도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예술가도 아니고, 기득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존재를 밝히지 않은 주인공 때문도 아니다. 'Sonate vom guten Menschen'(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소설을 발간하고 헌정사에 고마움을 표현한 예술가와 그 책을 구매하면서 "Für mich"(나를 위한)라고 말한 주인공의 한마디 때문이다. 







아마도 감독이 '타인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예술은 인정받고 이해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였을 것이다. 삶의 무게로 인해 완고해진 나의 마음을 흔들어 주는, 어두워진 나의 세계에 흔들리는 한 줄기 빛을 넣어주는, 그 사소함이 언제나 우리를 구원한다,는 단순명료한 진리를 이야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이 시, 결국 이 모든 것은 이 구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영화, 참 적절하고 마음 시린 그런 작품이라, 널리 널리 추천하고 싶어진다.




ERINNERUNG AN DIE MARIE A.


Bertolt Brecht

 


1

An jenem Tag im blauen Mond September

Still unter einem jungen Pflaumenbaum

Da hielt ich sie, die stille bleiche Liebe

In meinem Arm wie einen holden Traum.

Und über uns im schönen Sommerhimmel

War eine Wolke, die ich lange sah

Sie war sehr weiß und ungeheuer oben

Und als ich aufsah, war sie nimmer da.

 

 

2

Seit jenem Tag sind viele, viele Monde

Geschwommen still hinunter und vorbei.

Die Pflaumenbäume sind wohl abgehauen

Und fragst du mich, was mit der Liebe sei?

So sag ich dir: Ich kann mich nicht erinnern

Und doch, gewiß, ich weiß schon, was du meinst.

Doch ihr Gesicht, das weiß ich wirklich nimmer

Ich weiß nur mehr: ich küßte es dereinst.

 

 

3

Und auch den Kuß, ich hätt ihn längst vergessen

nicht die Wolke dagewesen wär

Die weiß ich noch und werd ich immer wissen

Sie war sehr weiß und kam von oben her.

Die Pflaumenbäume blühn vielleicht noch immer

Und jene Frau hat jetzt vielleicht das siebte Kind

Doch jene Wolke blühte nur Minuten

Und als ich aufsah, schwand sie schon im Wind.

                   


마리아 A에 대한 추억


베르톨트 브레히트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주나무 아래에 말없이

그녀를,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사랑스러운 꿈 같이 나의 품에 안았다.

우리위의 아름다운 여름하늘에는

내 눈에 들어온,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은 구름이 있었고,

내가 올려다 보았을 때, 이미 거기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많고 많은 달들이,

소리없이 여기저기로 지나가버렸다.

그 자두나무들은 아마 베어져버렸을 것이고,

너는 내게, 사랑은 어찌 되었나 묻고 있는가?

그럼 나는 네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분명히, 네가 의미하는 바를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그녀에게 키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키스도, 그 구름이 없었다면,

오래전에 잊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 항상 구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구름은 아주 하얗고 위에서 내려왔다.

자두나무들은 아마도 여전히 그곳에서 꽃을 피우고,

그 여인은 어쩌면 7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구름은 몇 분동안 피어올랐고

내가 올려다 보았을 때, 이미 바람에 사라져버렸다.


(translated by Sophie03, 영화속 자막의 해석이 무언가 이상하여 번역을 시작했다가 끝까지 하게 되었다. 블로그들에 해석들이 올라와 있지만, 하는 김에 끝까지 해석하였으므로 정확성은 절대 보장할 수 없음)








책 읽어주는 남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출판사
세계사 | 1999-01-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특이한 사랑과 가슴 아픈 과거에 대한 추리소설 같은 소설책.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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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2. 2. 00:17


'마지막'이란 단어는 늘 눈물겹다. 마지막을 이야기하며 기쁘게 웃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든 혹은 잘 지내왔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늘 아쉽게 마련이니까.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무렵 갑자기 나의 그림자가 길어진 듯 느껴지면 나는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를 한 번 이상은 되뇌이게 된다.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다. '남국의 날들을 이틀만 더 허락하소서'. 더운 여름 내내 가을을 기다리다가도 여름이 끝나는 기미가 느껴지면 늘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허락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이틀이 주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나는 그냥 그 이틀의 날들을 즐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늘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보내면서 즐기는 수 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듯 하다. 

2013년 1월 31일자로 내가 4년 7개월을 몸담은 회사의 법인이 없어지고, 2013년 2월 1일자로 새로운 통합법인이 출범하였다. 사무실도 업무도 현행 유지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다가, 1월 31일이 오고 마지막날이구나 생각하니 이 곳에서 보낸 많은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나의 세번째 회사가 사라지는 순간, 마음이 좋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시를 다시 떠올렸다.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신이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에 놓고, 

벌판 위에 바람을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이 꽉 찰 수 있도록 명하시고, 

남국의 날들을 이틀만 더 허락하소서. 

완성으로 이끌어 주시어 

짙은 포도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자는, 계속 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혼자인 자는 오랫동안 그럴 것입니다. 

깨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리고 낙엽이 뒹굴 때 여기저기 불안하게 

가로수길을 헤메일 것입니다." 


(translated by Sophie03, 자의적 해석이므로 정확성은 절대 보장할 수 없음)



마지막 연에 대해서는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데 이번에는 좀 스산한 느낌이기는 하다.


1월 31일에 이 시를 떠올리며, 위대했던 여름을. 아직은 꽉 차지 않은 과실을, 그래서 아쉬운 남국의 이틀을 생각했다. 4년 7개월이라는 뜨거운 여름을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많이 고민했고, 많은 성장을 하였으며 나의 장·단점을 알아낸 시간이었다. 이력서를 새로 쓰지 않고 나의 네번째 회사에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함께 한다.




Herbsttag

Rainer Maria Rilke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1. 11. 23:25



모든 독일 어린이들이 암송해야 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일 시 한 편이 여기 있다;


산봉우리마다엔
침묵이,
나무 꼭대기마다에서도
너는 느끼지 못한다.
여린 숨결 하나;
어린 새들은 숲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참으렴, 곧
너도 휴식을 취할 테니.

이 시의 시상은 너무나 단순하다 : 숲이 잠들고, 너도 곧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는 것. 시의 천분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번안시로는 모든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오직 독어 원어로 읽을 때만이 이 시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것이다 : 

Ueber allen Gipfeln
Ist Ruh,
In allen Wipfeln
Spuerest du
Kaum einen Hauch ;
Die Voegelein Schweigen in Walde.
Warte nur, balde
Ruhest du auch.

이 시의 시구들은 음절 수가 모두 서로 다르고, 장단격, 단장격, 장단단격이 불규칙적이며, 여섯번째 시구는 다른 구절들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길다 : 그리고 시가 두 개의 4행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문법에 잘 맞는 그 첫번째 4행절은 대칭적이게도 다섯번째 시구에서 종결되면서, 이 유일하고 독특한 시 아닌 다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하게 평범한 만큼이나 기막힌 하나의 멜로디를 창출하고 있다.  


(pp39~40)



불멸

저자
밀란쿤데라 지음
출판사
청년사 | 2000-04-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바램 별로 없고 낙서,훼손 없이 깨끗 / 445쪽 /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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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워낙 방대해서 그 작품을 감히 다 읽을 생각도 못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괴테의 시. 그리고 그 괴테의 시가 실린 밀란 쿤데라의 좋아하는 작품이다. 역시 괴테는 괴테이고, 밀란 쿤데라는 밀란 쿤데라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것일까. 괴테의 시해설릉 자신의 소설 속에 녹여넣을 생각을 하다니!

이 시가 가진 평화로운 고요가 독일어로 읽으면 더 잘 느껴지는데, 혹시 독일어를 읽을 줄 안다면 원문을 소리내어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낭독을 하는 순간 느껴지는 고요함이 있으니까. 이 작품은 괴테가 죽기 얼마전에 쓴 시라고 한다.


바로 그 고요함의 근원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 Ruhe일 것이다. Ruhe는 고요, 침묵이라는 뜻인데, 괴테가 이 시에서 사용하여, "죽음과 같은 고요"라는 서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 중 하나인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가 읖조리는 그 말, "날 좀 그만 내버려두란 말이오."의 독일어 표현에도 Ruhe가 들어간다. 종종 나도 소곤거리는 바로 그 표현,  "Lass mich in Ruhe." 깔대기 법칙처럼 내가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도 파트리크 쥐스킨트도 다 괴테를 가리키고 있다. 괴테는 괴테니까 당연한 것일지도.




좀머 씨 이야기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1998-01-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92년출간 / 122쪽 l B6소설 독일소설 책소개 원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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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금이지만, 감기 걸린 내게는 평화로운 고요가 필요하므로 나만의 Ruhe 이야기를 적어둔다. 참, 위의 시에는 제목은 없다, 이럴 경우 첫 행을 따서 Ueber allen Gipfeln(산봉우리마다)라고 해야 하지만, 나는 그냥 쉽게 Ruhe 시라고 생각하곤 한다.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1. 8. 00:12


최근에 읽은 책의 제목이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이다.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그 구절은 헤르만 헤세의 시의 구절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시 중에 「혼자」라는 것이 있다. (『내 젊은 날의 슬픈 비망록』, 홍석연 옮김, 문지사, 2002) 거기 이렇게 적혀 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저자
정진홍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11-1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정진홍의 사람공부] 저자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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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해서 읽어도 되는 소설이나 에세이와 달리 시는 한 작품을 한 호흡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기 때문에 궁금한 마음에 원문을 찾아 보았다. (책속에 등장한 시집은 절판이었다...)




Allein

Hermann Hesse


Es fuehren ueber die Erde
Strassen und Wege viel,
Aber alle haben
Dasselbe Ziel.

Du kannst reiten und fahren
Zu zwein und zu drein,
Den letzten Schritt
Musst du gehen allein.

Drum ist kein Wissen
Noch Koennen so gut,
Als dass man alles Schwere
Alleine tut.





혼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모든 어려운 것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것 밖에는
잘할 수 있는 어떤 지혜도
능력도 없다.




요즘은 독어를 많이 잊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연은 내가 띄엄띄엄 번역하였다. 독일어 원문을 읽고 나자 참 헤르만 헤세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의 일치처럼 연말에 나는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참 헤르만 헤세는 헤르만 헤세 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는 풀기가 어려워진 수학 문제에 도전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때까지 스도쿠를 풀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수학 덕분에 행복한 때는 이 문제에는 해설과 정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끝까지 해답지를 열어보지 않고, 고독할 정도로 집중하여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춰보고, 해설을 읽는 시간이다. 나는 보통 수학 문제를 풀 때 1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버릇이 있는데, 해설에 따라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느냐가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1은 그냥 1이 아니라, 1000-999일수도, 10000/10000일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유레카의 심정을 이해했었다)


어떤 문제는 삼일을 고민하여 풀었었다. 수학문제를 풀지 않은 순간에도 나는 그 문제를 생각했었다. 어떤 오기로 해설을 참고하기가 싫었다. 여러번 꼬아져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뻔하게도 그 문제는 단순한 핵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내서 그 문제를 풀었다. 당연히 그 희열은 나의 것이었다. 


이렇듯 수학의 묘미는 대부분 정답이 있고,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도 된다는 데에 있다. 반면에 인생의 묘미는 대체로 정답이 없다는 데에 있다. 즉 어떤 상황에서 흘낏 볼 수 있는 해설집이란 것이 없다. 또 하나 수학 문제는 곁에 수학 천재가 있다면, 나와 다른 방식으로라도 반드시 풀어서 해답을 알려주지만, 인생 문제는 인생 천재도 없을 뿐더러, 풀어서 해답을 알려줄 수도 없다. 그것은 내 문제이니까. 그런 상황이 꽤 싫으면서도 또 인생을 즐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냥 해답집이 없는 수학문제집을 받아들고, 내가 해설집을 만들고 정답을 푸는 과정이라 여기면 흥미진진해진다. 때로 내가 판단오류로 풀이 과정이 엉망진창이 되고, 거기다가 옆사람이 선 하나 그으며 참견해 문제가 미궁으로 빠지기도 하고, 때로, 길고긴 출제지가 찢어져서 불완전한 문제를 받아들고는 창의력을 발휘해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런 문제집.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 의견이 정답이 될 수는 없는 철저히 개인화된 문제집.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모든 어려운 것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것 밖에는 잘할 수 있는 어떤 지혜도 능력도 없다. 인생이라는 수학 문제집은 늘 마지막을 혼자 풀어서 답을 내야 한다. 그 답은 본인만 구할 수 있으므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저자
헤르만 헤세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2-07-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로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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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