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014. 10. 18. 22:30

# 회사 사보글 청탁을 받고 작성한 글입니다. 지면으로 인쇄된 제 글을 읽자니 꽤 어색하더군요. 언젠가, 바로 아래의 사진에 관련된 글을 3개는 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두번째 글입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써온 글들에 들어간 이야기들이 좀 식상하기도 하고, 회사 사보글로 "주제"를 받아 작성한 글이라 좀 교훈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포스팅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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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구를 보고 나는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언어이니까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나의 비밀을 이제는 말해볼까 합니다.

유럽의 겨울이 끝나갈 무렵 달콤하고 기름진 과자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Ash Wednesday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사순절 동안 금욕의 시간을 맞이하기 전에 모두가 카니발을 즐기는 그 때이지요. 저도 스위스의 한겨울을 온몸으로 견디고 나서, 카니발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날의 경험은 강렬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지도 모르게 고요하던 도시가 한순간 시끌벅적해지고 길에서 만난 동양여자인 저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있던 도시는 동양인이 거의 없어서 평소 길을 걸어가면 다들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었습니다. 독일에 살던 친구가 딱 지금만 먹을 수 있으니 먹어두라고 했던 그 카니발의 과자는 사실 기름에 튀긴 과자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법이 풀려버린 것처럼 다시 고요해지고 사람들의 단순한 삶이 시작됩니다. 물론 그 기름진 과자도 자취를 감춥니다.

갑자기 고요해진 도시처럼 13년 2월 10일 설날 오후 3시에 나도 밀가루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설날연휴동안 많은 기름진 것들을 먹었으니 카니발이 끝나듯이 나도 불현듯 밀가루를 끊기로 그냥 마음 먹었습니다.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해외여행이나 출장기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밀가루를 먹지 않고 있습니다.

밀가루 단식의 좋은 점도 있지만 당연히 불편한 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점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같이 할 때 “밀가루를 끊은 저 사람과는 무엇을 먹을 수 있나?”하는 압박은 사실 소소한 정도입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도 리조또를 먹거나 샐러드를 먹으면 되니까요. 베지테리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섭취할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밀가루 단식자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압박은 늘 심리적인 것이지요. “저 사람이 밀가루를 끊었으니 나도 밀가루를 끊어야 하나”하는 웰빙에 대한 압박 말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면 느끼는 그 “잘 사는 삶”에 대한 부담을 본의 아니게 밀가루를 끊은 나를 만나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는 밀가루 단식을 권하지 않습니다. 저는 밀가루 단식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의외로 자주 그리고 많이 밀가루를 섭취하고 있습니다. 빵이나 면, 햄버거나 피자, 과자 등 우리는 자발적으로 밀가루 메뉴를 선택하여 먹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먹고 있는 어묵에도 트윅스에도 프링글스에도 시리얼에도 밀가루가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밀로 만드는 맥주도 마시면 안 됩니다. 끊고 보니 우리는 밀가루를 선택하여 살아온 것이 아니고,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밀가루 단식이란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삶 자체가 바뀌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간단히 칼로리발란스로 끼니를 때울 수도 없고, 동료들과 프라이드치킨을 나누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내게 “내일부터 밀가루를 끊어볼까”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아니요, 하지 마세요. 정 하겠다면 빵이나 면, 피자나 햄버거 중에 하나만 먼저 끊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어제도 내게 “내일부터 다 끊어볼까?”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이 이 글을 읽고, 혹은 나를 보고 밀가루 단식 실행을 고려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실패했습니다. 외부에서 강제되어진 의지는 도약으로 이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웰빙에 대한 목적을 정했다 해도, 반드시 밀가루 단식이어야 하지도 않고, 디톡스나 간헐적 단식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의 길은 모두 다르니까요.

다만, 결단이 필요한 일이지요. 매일 양치를 하듯이, 매일밤 잠을 청하듯이, 밀가루를 끊는 일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결단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심사숙고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비밀입니다. 내부에서의 결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순간, 즉 결단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게 된다면 삶은 이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스스로 결단하여 혼자서 이루어야 하는 일입니다. 타인인 내가 권하거나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결심하고 실행해야 도약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한걸음은 당신을 좋은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랜만에 더듬더듬 번역한 헤르만 헤세의 시 한 편을 덧붙이며, 당신의 결단을, 도약을, 변화를 응원합니다.



혼자


헤르만 헤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길들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당신은 말을 타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고,

둘 혹은 셋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지막 한 걸음을

당신은 혼자서 가야만 합니다.


모든 어려운 것들을

혼자서 하는 것 외에는

잘할 수 있는 어떤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Posted by Sophie03
[Story]2014. 7. 31. 23:55
벌써 7월 31일.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세월호 이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여전히 나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시간은 스스로를 재촉하여 여름의 한중간 7월말에 도달했다. 마음이 여전히 영화관에 가는 것도, 즐겁게 웃는 것도 꺼려서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깜빡깜빡 하지만, 세상 또한 자기만의 시간을 가고 있다.
그래, 나는 나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시간에 끌려 가고 있는가, 내가 시간을 끌고 가고 있는가, 라는 해묵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만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버릴 수는 없다.


# 인터넷 어디선가 보고 저장해둬서 출처가 명확치 않습니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

이 사진, "YESTERDAY YOU SAID TOMORROW" 인터넷 어디선가 봤는데, 우측 하단에 JUST DO IT과 나이키 로고가 보인다. 블로그에도 적어두었지만, 저 "JUST DO IT"으로 인해 우리는 남들은 다 제대로 사는데 나만 제대로 못 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어느 순간부터 피하는 슬로건이지만, 어쨌든 상단 중앙의 "어제 너는 내일이라고 말했지"라는 저 문구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 내일로 미루는 일이 없이, 하루하루 밀가루도 끊고, 요가도 대체로 정해진 대로 가고, 운동도 영양소도 균형감 있게 살려고 한다. 정말로 just do it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는 사실 좀 의문이다.
회사에서 하는 멘토링, 나보다 열살 연하의 신입사원이 물었다. "십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당연히 모른다. 십년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다. 십년전의 나는 대학원의 마지막 방학을 보내고 있었는데, 전년도 가을학기가 끝나자마자 교환학생을 가서 겨울을 보내고, 봄학기가 시작한 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와서 진도 따라가기 바빴던 숨가쁜 일년을 보낸 후라, 그야말로 체력저하로 잉여의 쉼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 때의 나는 나의 두번째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십년후에 내가 세번째 직장을 다니고, 판교로 출퇴근하며 살고 있을지에 대해 그 어떤 추측도 해본적이 없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의 나와, 논문을 작성하던 나와, 두번째 직장을 다니던 나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그러니 십년후의 나도 지금의 나와 또 일년후의 나와 그 시간들을 살아낸 내가 만들어낸 복합체일 따름이다. 무엇이 되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나에게 십년후의 모습을 추정하라고 한다면, 여전히 밀가루를 끊고, 요가를 하고, 여행을 가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래 맞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도 하지 않고, 운동을 시작할 예정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또 그런 사람도 될 수도 없다. 그저 현재의 시간을 충실히 사는 사람이니까.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무엇이 되는 순간을 milestone으로 정하지 않고, 밀가루 끊기를 시작한 날을, 요가를 시작한 날을, 독후감을 쓰는 그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오늘 우연히 만난 반가운 지인과의 짧은 대화.
나 : 삶에 엔터테인먼트가 필요해요.
지인 : 삶이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지.
그래, 나의 표현보다는 지인의 표현이 더 수긍이 된다. 삶이, 현재가, 지금이 내 시간이 되고, 엔터테인먼트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즐거웠다거나, 미래가 즐거울 것이라던가 말고, 바로 지금을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사실 그것은 내가 성수대교 사건 이후로 다짐했던 것이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갇혀 있는 나이지만, 십년후의 내가 세상에 존재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현재를 살아야 한다... 20년동안 내가 그러기 위해 노력해온 것처럼.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