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se]2013. 9. 1. 09:30



"이튿날,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 해변을 따라 빗속을 걸어 등대까지 산책을 하던 중" (p10)


이 구절을 읽고, 나도 모르게, 바르셀로나 해변에 가 있었다.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순간 나는 바르셀로나 해변가의 빗속에 서 있었다.


2011년 2월에 나는 출장으로 바르셀로나에 가 있었다. MWC 기간이니, 당연히 시내의 호텔은 가격이 너무 비싸 회사의 출장비 규정에 따라 시내에 투숙할 수는 없었다. 어렵게 잡은 호텔이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40~50분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그 때가 바르셀로나 세번째 방문이었는데, 처음으로 외곽에 호텔이 잡혀 처음에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별장과 같은 2층집들을 지나면 바다에 나갈 수 있었다. "덤"과 같은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 비행기라서 오전 동안 호텔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나는 불현듯 비오는 바다 생각이 나서 홀로 바다로 나갔었다. 우산이 바람에 휘어질 정도의 날씨라서, 바다에 도착하니, 강한 파도 소리와 비 소리, 그리고 우산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나... 나는 그 바닷가에서 일출도 봤고, 그 시간이 꽤 감동적이었지만, 사실 그 시간이 더 좋았다. 카메라를 안 가지고 나가, 아마도 당시에 가지고 있던 폰으로 사진을 찍었겠지만, 사진으로 남겨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던 응어리가 바람에 풀어져 날아가는 듯 했다. 살면서 간직하고 있던, 나도 모르는 설움이 어느 순간 흩어져 나는 무장해제가 되고 말았다. 몸을 가누기도 어렵던 그 바람 덕분에, 나는 자연의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여름거짓말』에서 저 구절을 읽는 순간, 잊고 있었던, 그 시간의 바람 소리가 되살아났고, 그 때의 위로를 다시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여름 거짓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7-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올 여름 놓쳐서는 안 될 걸작 중의 걸작” _SWR(Sud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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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학부 시절에 읽은 이후에 참으로 오랜만에 읽었다. 『여름거짓말』은 7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첫번째 순서로 수록된 작품이 "성수기가 끝나고"이다. 성수기가 끝나고 바닷가 휴양지로 휴가를 떠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 비오는 해변을 가더니, 일출을 보러도 바닷가에 간다.


드디어 그는 해변에 도착했다. 태양은 황금빛으로 솟아올랐다. 바다도 붉게 들끓고 하늘도 벌겋게 타올랐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이 이어졌다. 결국엔 구름이 모든 것을 꺼버렸다. (p29)


태양의 일출이 주는 위로. 그 찰나의 순간을 기다리는 영겁의 시간. 일출을 기다려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다른 색인 이유, 혹은 다른 색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다. 










30분 동안 찍은 사진들 중에 추린 사진들. 2월의 바르셀로나의 겨울의 바닷가에서의 한시간여, 태양을 보던 순간의 추위는 저 황금빛 태양으로 사라졌다. 삶의 찬란한 순간들에 숨겨진 어둑어둑한 시간에도, 어쩌면 태양은 늘 이렇게 감동적으로 우리위로 떠오르고 우리를 보듬어 주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바다와 태양 뿐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들을 언제나 선물하면서!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9. 1. 00:01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피쳐』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을 때, 회사일로 무척 바빴고, 이런저런 여력이 없어서, 읽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내 주변의 모두가 읽은 "너무나" 베스트 셀러일 경우에는 잘 안 읽게 되는 개인적인 특성에 따라, 읽지 않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매번 신간이 나오는 더글라스 케네디가 궁금해져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2012년 9월에 『행복의 추구1,2』을 시작으로, 『모멘트』, 『템테이션』, 『리빙 더 월드』, 『파리 5구의 여인』, 『빅픽쳐』, 『더 잡』을 나열한 순서대로 읽었다. 『빅피쳐』는 2013년 7월이 되어서야 읽었다. 『빅픽쳐』도 『파리 5구의 여인』도 영화가 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는 작품들이다. 특히 『빅피쳐』는 그동안 더글라스 케네디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영화도 개봉한다고 하니, 이제 그 소설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한 번 알아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고 하면, 소설부터 읽는다. 예외가 있다면, 해리포터는 1권만 그렇게 하고 늘 영화만 보거나, 둘다 건너 뛰었다. 영어로 읽어서 그런 면도 있지만, 해리포터는 이상하게 이미지가 상상이 되지 않아, 읽는 동안 애 먹었었다. SF는 상상이 되지만, 마법의 세계는 이미지화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한계인가 보다 생각했었다.


다시 더글라스 케네디로 돌아와, 그의 작품들은 대개 비슷한 플롯의 구성이다. 잘 나가던 주인공이 어느날,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야,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본인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삶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엄청난 절망의 순간이 오는데,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살게 되더라, 살아야 하더라, 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주인공에게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 글의 주인공인 『파리 5구의 여인』은 약간 다르다. 이제부터 스포일러가 될 것이니, 혹시 소설과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읽기를 중단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파리5구의 여인

저자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출판사
밝은세상 | 2012-0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빅 픽처] 작가 더글라스 케네디의 로맨틱 스릴러! 아마존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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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시작할 무렵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영화관을 찾지만 사실은 영화관에서도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영화 속에도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탈출하고자 하는 세계를 영화에서 다시 보게 되는 셈이랄까요."
우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도피를 시도한다. 누군가처럼 하루아침에 평생 동안 공들여 쌓아온 삶을 버리고, 갑자기 파리 행 비행기 표를 사기도 하는 것이다. (p9)



그런데 사실, 『파리 5구의 여인』은 소설 속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도 존재하는 현실이 소설에서는 초현실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삶을 옭아메는, 우연과 필연의 소용돌이에서 주인공은 정답을 찾을 수가 없다.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비극들이 긴박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동안, 갑갑한 숨이 차오르는 순간들을 몇 번 만나게 된다. 초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므로, 어쩌면 현실에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비극적 사건들은 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현실성 때문에 읽는 동안 가슴이 답답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긴박한 사건들, 복잡한 관계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종종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에는 그 관계들, 그 인과관계들,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 등이 삭제되고 시간이 단순하게 나열되어, 원작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훼손하므로, 나는 사실 그 걱정을 하면서 영화를 봤다.




파리 5구의 여인 (2013)

The Woman in the Fifth 
6.4
감독
파웰 파울리코우스키
출연
에단 호크,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요안나 쿨리크, 사미르 궤스미, 델핀 쉬요
정보
스릴러, 로맨스/멜로 | 프랑스, 폴란드, 영국 | 85 분 | 201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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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대이상이었다. 복잡한 관계들을 단순화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한 주인공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에단 호크의 연기는 소설에서 느꼈던 갑갑함보다 더, 현실의 갑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본인의 가정을 파괴한, 본인 자신을 파괴한 그 비극을 어떻게 떠안고 살 것인가? 소설 속의 한 구절에 그의 답이 있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비극이 있다. 다만 슬픔을 떠안은 채 적당히 적응하면서 살아갈 뿐이리라. 그러면서 차츰 상실감을 품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리라. (p190)



초현실적인 존재가 문제가 아니었다. 초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할 정도로, 그의 삶이 지속되는 동안 풀리지 않을 그의 비극은 그의 몫이 되었다. 소설에서는 사건 위주로 긴박하게 돌아가, 몇몇 구절로 그의 비극에 공감해야 한다면, 영화는 각색이 잘 된 시나리오로, 그리고 에단 호크의 좋은 심리 연기로, 그의 비극이 비단 그만의 비극이 아님을, 우리 모두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비극임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의 에단 호크의 이 표정은 사는 동안 종종 떠오를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더글라스 케네디를 좋아하신다면, 혹은 에단 호크를 좋아하신다면, 한번쯤 영화를 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소설은 읽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그리고 소설의 표지 사진은 "파리 5구의 여인"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에 비해, 영화 속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완벽한 캐스팅이다!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7. 7. 00:36



하루키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어찌 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 하루키는 두 명이다. 에세이스트 하루키와 소설가 하루키를 모두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이유는 다르다. '에세이스트 하루키는 늦은 저녁 혹은 이른 밤에 동네 편의점 앞에서 꾸준함이 미덕인 동네 오빠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로 글을 쓸 예정이었는데, 소설가 하루키씨가 본인의 이야기를 먼저 쓰라는 듯 내게 신호를 보내서 이 글을 먼저 쓰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이번 신간 이야기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모든 것이 완벽했던 스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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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극성스러운 독자로 변신하는 나는 이 책도 1판1쇄로 두어번 읽었다. 사실 처음에 읽기 시작하였을 때, "이 책의 작가는 하루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이름에 색채가 있다'는 문장에서 보면 어느 일본 작가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상하게 하루키가 아닌 것만 같았다. 중반쯤 읽었을 때 깨달았는데, 하루키가 맞았다. 다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직전 소설이 『1Q84』였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소설이 소설가 하루키에 부여한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였기 때문에, 색채가 없는 쓰쿠루씨의 이야기는 왠지 미미한 사건과 같아 보였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정확히 말하면, '쓰쿠루' 덕분에 다시금 하루키를 찾은 기분이다.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사소함이 만들어낸 1차원적인 인생의 사건은 인생 전반에 3찬원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는 흔적들을 간직한 채로 인물들은 제각기 본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를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pp51-52)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p244)

그렇지만 이야기가 간단하지만은 않을 터이다. 사람은 매일 움직이고 나날이 위치를 바꾸어 간다. 다음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p277)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 (p304)

그래서 쓰쿠루씨의 인생이 담긴 이 소설은 당연하게도 열린 결말이다. 사실 마지막 열장정도를 남겨두고는 '어, 이렇게 몇장 안 남았는데,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개되면 안 되는데'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음, 역시...'하고 책장을 덮게 되었다. '쓰쿠루'씨의 인생은 어찌 보면 이제 시작이니까, 여기서 어떤 결말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소설가 하루키씨의 방식이니까. 

그런데 사실 이번에 오랜만에 진지한 생각을 했다. '내가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① 그 작가의 이야기/구성력/말하고자 하는 바를 좋아하는 것 ② 그 작가의 문장력을 좋아하는 것 ③ 그 작가의 이야기와 문장력을 모두 좋아하는 것으로 크게 분류되는데, 하루키의 경우는 ③번에 속한다. 내가 전작주의자가 되어 모든 작품을 읽고 대부분의 작품을 수집하는 경우 역시 ③번에 속한다. 그런 경우에는 책을 또 읽고 또 읽어서 작품이 가진 또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크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좋아하는 소설가 하루키씨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소개하기"이 된 것이다. 사실 표시해둔 구절들은 더 많지만, 읽기도 전에 초칠 수는 없으니, 이 정도만 옮겨둔 것이다. 소설가 하루키씨의 문장들이 주는 위로가, 쓰쿠루씨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위로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은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은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p363-364)



두어번 읽어보니 한번쯤 읽어보실 것을 권유해 드리고 싶군요! 『1Q84』가 하루키 소설스럽지 않다, 예전같지 않다는 의견을 제게 피력하신 저의 지인분들께 특히 권유해 드리고 싶어요!







1Q84. 1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9-08-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무라카미 하루키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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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4. 6. 22:52




선셋 파크

저자
폴 오스터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3-03-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저마다의 상실을 지닌 젊은이들의 이야기!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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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파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을 찍는 일을 한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중략) 집 하나하나가 실패의 이야기이다. 파산과 체납, 빚과 가압류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 그는 무슨 사명처럼, 풍비박산한 그들의 삶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을 기록함으로써, 자취를 감춘 가족들이 한때는 여기에 있었으며, 그가 결코 볼 일도 없고 알 일도 없는 그 사람들의 유령이 빈집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버려진 물건들 속에 아직 남아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p7)



폴 오스터는 폴 오스터다. 한 번 책을 잡으면 빠져들게 하고, 다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게 만든다. 책이 좋으면 마치고 나서 첫 장이나 첫 챕터를 다시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선셋파크는 아예 두번째에도 완독을 하게 되었다. 두번째 읽으면서 작가가 얼마나 쫀쫀하게 은유나 상징을 사용하였는지와 사전 포석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깔아놓았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다.


금융위기가 닥치고 난 이후의 미국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흔히 폴 오스터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극적인 사건 대신, 소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마일스 헬러 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등장하는 이들 모두의 성장 소설에 가깝다. 그 성장은 비단, 청소년에서 어른이 되었어요! 류의 흐름이 아닌, 금융위기 시대를 겪어내고 있는 전 미국인들에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앨리스의 논문을 핑계로, 베트남 전쟁 이후의 참전 용사들의 삶을 위기 이후의 미국인들의 삶에 적절히 포함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는 곧 마일스가 찍는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으로 현대화되며, 동시에 빙의 “망가진 물건들의 병원"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다 제정신으로 귀향했어도 평생 망가진 채로 살았으므로 전쟁 이후의 세월조차 여전히 전쟁의 일부였고, 악몽을 꾸고 땀을 흘리는 밤이 계속 되는 나날, 주먹으로 벽을 치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p112)



그(빙 네이선)가 보기에는 태어나기 거의 20년 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 이래로 한때 <미국>으로 통했던 개념은 이제 다 소진되어 버렸다. (p80)



그런 이유로 그는 3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 반격하고 싶어서였다. <망가진 물건들의 병원>은 파크 슬로프 5번가에 있었다. 간이 세탁방과 중고 옷가게 사이에 위치한 그의 가게는 점포 앞에 판을 깔고 수동 타자기, 만년필, 기계식 손목시계, 진공관 라디오, 전축, 태엽 감는 장난감, 사탕 뽑는 기계, 다이얼식 전화기 등 이제는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시대의 물건들을 수리하는 일만 하는 초라한 장사였다. (중략) 그는 반세기 전의 해묵은 사업에서 만들어진 다 낡아 빠진 물건을 또 한 점 대할 때마다 전쟁에 임하는 장군과도 같은 의미와 열정으로 임했다. (p81)



또한 가장 미국적인 야구의 선수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등장 인물들을 묘사한다. “럭키"는 실제로 럭키가 아니며 명시적인 사건들 외에는 운이 좋지도 않고, 주목받지도 못한 채 살아, 어느날 부고에 실리게 되는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당연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폴 오스터는 도입부분에 아예 이렇게 기술해 둔다. 



(생략) 그가 지난달 헌책방에서 2달러를 주고 산 2천7백 페이지의 1985년 개정 최신 증보판(“야구 백과사전”) 속에 담긴 디킨스적인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p36)



“디킨스적인 정신"으로 다양한 야구선수들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동시에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양한 시각에서 기술한다. (디킨스적인 정신이란 많은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시점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하다...)


작가의 상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일스가 필라를 만났을 때 각자 읽고 있었던 책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던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가 드러나는 작품을 전형적인 미국의 지식인 계층 출신의 마일스와 쿠바 이주민 필라가 동시에 읽고 있었다. 또, 메리-리가 극장에 서기 위해 뉴욕으로 오게 한 작품은 “행복한 날들"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사무엘 베게트의 작품으로, 1부에서는 하반신만 흙에 묻혀 있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2부에서는 목을 제외하고 전신이 흙에 묻힌 채로 독백하는 이 부조리 극을, 폴 오스터는 마일스 가족들이 화해하는 시점에 끌어들인다. 인간 존재와 관계의 덧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혹은 그 반대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함인가. 소설의 결말을 보면 아마도 후자이겠지만, 읽는 동안 계속 고민하게 만든 극적 장치였다. 


극적 장치라고 쓰고 나니 또 재미난 것이 메리-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희곡처럼 지문도 함께 서술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제 잊어라, 마일스. 그건 사고였다니까.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다. 침묵, 4초잔.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음식이 왔나 보다. (일어나서 마일스에게로 다가가 이마에 키스해 준 다음 레스토랑에서 온 배달원에게 문을 열어 주러 나간다. 뒤돌아보며 마일스에게 말한다) 어느 것으로 하겠니? 채식 메뉴랑 육식이랑?

(긴 사이. 억지로 웃으며) 둘 다요! (p283)



또, 모리스 헬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시점에는 대부분은 “그"로 서술하였지만, 죽음을 경험한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전지적 작가가 모리스 헬러를 “너"로 지칭하며, 모리스 헬러의 행동들와 행동의 이유까지 친절하게 서술해 준다. 62세의 모리스 헬러조차 한 차례의 성장을 겪게 된다. 생각해 보면, 금융 위기 이후에 젊은 세대들의 반응과 중년층의 반응은 다르기 때문에, 모리스 헬러의 변화가 소설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모리스 헬러의 어머니)는 렌조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들의 부모들 모두가 그랬듯이, 그들의 아버지가 전쟁에 나갔든 나가지 않았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어머니들이 열다섯 살이었든 열일곱이었든 스물둘이었든 전쟁의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이할 정도로 낙관적인 세대였다. 거칠고 믿음직하고 근면하면서도 약간은 어리석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의 위대성에 대한 신화를 사들였고 베트남의 소년 소녀들과 조국이 병들고 파괴적인 괴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던 성난 전후 세대 아이들인 자기 자식들보다 세상을 덜 의심하며 살았다. (p171)



그러나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태어난 세계의 특징이었다. 투지니 결단이니 여덟 번 쓰러지면 아홉번 일어나라는 식의 할리우드 영화 속 뻔하디뻔한 진부한 이야기들을 기워 붙인 윤리적 우주였다. 그 나름대로 감탄스러운 점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그중 상당 부분은 가식이었음을, 겉보기에는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것만 같던 어머니의 내면에도 공포와 두려움과 견디기 힘든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pp172-173)



1월 25일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누적되어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능력이 약화된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없기에, 말년에는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젊은 시절의 큰 비극에 맞먹는 힘으로 울릴 수도 있다. <낙타 등을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으로 올린 지푸라기 한 가닥이다.> (p285)



나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죽음 직전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모리스 헬러의 변화는 베트남 전쟁 이후의 ‘팍스 아메리카나'와 이후의 하락기,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로 대변되는 ‘상실'의 크고 작은 충격들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질겁하고 생각해보고 깨닫는 과정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는 그녀가 얼마나 어린지 듣고 질겁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아들이 그 나이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만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의 삶은 중도에 멈추어 제대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다 자란 성인 남자일지라도 내적 자아는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 어딘가쯤에 머물러 있다. (p299)



이제 마일스 헬러의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마일스 헬러는 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의 이야기를 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수위 조절을 고민하기 이전에, 사실 작품을 읽으면서, 마일스의 부분에서는 ‘let me in peace’/‘Lass mich in Ruhe’를 많이 떠올렸다. 한국이라면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았겠지, ‘힐링’해야 하고, ‘독설’을 들어야 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빨리 돌아서지 못한다며 닥달 받았겠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일, 현재를 현재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은, 결국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이다. 마일스 헬러가 그랬듯이. 쓰고 보니, 마일스 헬러에 대해 쓸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인 듯 하다. 

나머지는 작품을 직접 읽는 것으로, 그래서 결국 “폴 오스터는 폴 오스터다, 그와 같은 세대에 살아, 그의 신작을 바로 읽을 수 있음이 기쁘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라고 추측해 본다.)



대학을 그만두고 제 힘으로 독립한 이후로 7년 반 동안 그가 뭔가 이룬 것이 있다면 현재를 사는 것, 지금 여기 말고는 생각하지 않는 이와 같은 능력이었다. 남들 눈에 칭찬할 만한 성취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상당한 수련과 절제를 통해 얻은 능력이었다.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열망이나 희망도 갖지 않고,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고, 하루하루 세상이 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의 것만을 원하는 듯이 사는 것. (pp10-11)



버스가 여행의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 북부에 들어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겨울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했다. 소년 시절에 보낸 겨울의 추운 낮과 긴 밤이 떠오르고 갑자기 과거는 미래로 바뀌었다. (p75)



아니, 자퇴는 복수이자 태업이라는 적대적인 행위, 상징적 자살이었다. 며칠 전 아파트에서 엿들은 대화가 가져온 결과라는 점을 모리스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p189)



잡담은 할 줄을 몰랐으며 자신의 비밀을 누구하고도 나누지 않으려 했다. 마일스는 전쟁에 나갔다 온 것이다. 모든 병사들은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늙은 남자들이며 자기들이 치른 전투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 과묵한 남자들이다. 마일스 헬러는 대관절 어떤 전쟁으로 행군해 갔을까, 어떤 것을 보았을까, 얼마나 오래 전쟁터에 있었을까? 알 수 없지만 그가 상처 입었다는 것, 결코 낫지 않을 내면의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p253)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더 나은 사람,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요.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좀 공허하기도 하지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4년 동안 대학에 가서 전 과정을 이수했다고 증명해 주는 학위증을 받는 식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더 나아졌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더 강해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계속 밀고 나갔어요. 한참 지나니까 목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노력 자체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사이, 또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투쟁에 중독되어 버렸어요. 저 자신을 놓쳐 버리고 만 거죠. 계속 죽 해나갔지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더는 모르게 되었어요. (p281)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정말 마무리. 이 책을 읽으면서, 아마도 십여년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아래의 구절을 읽다가는, 역시 오랜만에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제 그는 한겨울 베네치아의 눅눅한 냉기, 거리로 무릎 높이까지 넘쳐흐른 운하, 불기 없는 방들의 몸이 떨리는 외로움, 그 속의 어둠의 힘에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는 머리, 이 너무나 맑고도 너무나 작은 세계에 의하여 파열해 버리는 삶에 대하여 생각했다. (p153)






위대한 개츠비(세계문학전집 75)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주) | 2010-07-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국의 192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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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베니스에서의 죽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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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 | 2012-09-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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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Day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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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PGW | 1961-09-01 출간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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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In 'Happy Days, ' Beckett pursues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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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