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013. 4. 5. 00:19




오늘은 영화 이야기. 

백두대간에서 배급하는 콰르텟이라는 영화를 풍월당에서 시사회를 해서 운좋게 당첨되어 날씨가 좋은 토요일 오전에 어머니와 다녀왔다. 백두대간도 풍월당도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지만, 오늘의 이야기의 주제는 콰르텟과 어머니이니 옆으로 새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시사회 내용 URL ☞ click)


더스틴 호프만 감독의 콰르텟은 밀라노의 '안식의 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이다. 안식의 집은 베르디가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해 세운 양로원으로 보통 베르디의 집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시사회에서 박종호 대표가 안식의 집 영상이며, 베르디의 콰르텟 영상이며 보여주어, 더욱 재미난 시사회였다. 이 영상들을 보고 더스틴 호프만은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영화 콰르텟의 배경은 영국의 은퇴한 음악가들의 양로원인 비첨하우스로, 이 음악가들의 양로원은 재정위기에 처한 상태이다. 그래서 운영금 마련을 위한 갈라콘서트를 기획하는데, 외모와 함께 늙어진 목소리와 연주로 꾸며지는 음악회 준비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다룬다.  





콰르텟 (2013)

Quartet 
9.3
감독
더스틴 호프먼
출연
매기 스미스, 마이클 갬본, 빌리 코널리, 톰 커트니, 폴린 콜린스
정보
코미디, 드라마 | 영국 | 98 분 | 201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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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또한 감동적이다.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이었던 것은 기네스 존스 여사가 젊은 시절에 녹음한 연주가 아닌, 늙어진 목소리로 영화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OST에도 그 연주를 담았다는 점이었다.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나이 먹은 목소리로 일부 불안정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 목소리가 더해져 영화가 더 감동적이고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것 같다. 분명히 절정기의 연주도 아름다웠겠지만, 현재의 연주도 목소리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노년의 오드리 헵번의 사진처럼 기네스 존스 여사의 목소리도 흔히 인용되는 문구인 'GROWING OLD IS MANDATORY. GROWING UP IS OPTIONAL'의 멋진 예시였다.


영화가 끝나고 어머니에게 재미있었냐고 물으니 '재미있었는데 마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하신다. 이들의 노년이 비단 남의 이야기 만은 아니기 때문인 듯 하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니까. 내가 어머니의 나이듦을 실감했던 때는, 2011년 연말의 홍콩 여행 때였다. 사실 홍콩 여행은 어머니와 나, 여동생 세 모녀의 첫 해외동반여행이었다. 내 기준에 홍콩은 거리도 멀지 않고, 도시내 이동이라 괜찮을 줄 알았지만, 어머니의 체력은 내 추측과는 달랐다. 그 해 봄에 산티아고의 길을 일주일 가량 다녀오셨기 때문에 과신한 부분도 있고 워낙 동안이시라 지하철은 공짜로 타시지만 자리양보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나도 어머니에게는 세월이 멈췄나보다 했지만, 그러려니 하는 나의 어림짐작과는 꽤 달랐다.


이제 안경이 늘상 있어야 하고, 더는 빠른 걸음일 수 없고, 끼니를 거르면 기운이 없고, 내가 한살한살 나이를 먹는 동안에 우리 어머니는 두살두살 나이가 차올랐나보다. 그런 어머니가 이 영화를 보고 재미있었는데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고 계속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여전히 꿈꾸는 문학소녀 이지만, 이제는 본인의 한계를 자주 체감하신다. 


그래서 이 시를 보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참 우습다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쓸쓸해서 머나먼

저자
최승자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0-01-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상징적인 사유로 다시 돌아온 시인 최승자!등단 서른 해를 맞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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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나는 홍콩 여행이 힘겨웠었다. 회사 생활이 유난히 힘겨웠고 외로웠던 2011년을 마치며, 휴가를 거의 사용하지 못해서 12월에 몰아써야 하는 상황이었고, 급작스럽게 여행을 준비하기에도 빠듯했다. 그 때는 다시 내부로 침잠하던 시기라, 혼자 여행을 떠나 아무런 교류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가 컸었는데, 어찌저찌 하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들이 다 힘겹기만 했는데, 생각해 보면, 나 어릴 적에 씩씩하게 잘 걷고, 열심히 봉사하러 다니고, 어두운 새벽미사에 나를 데리고 다니던 어머니도 아마 삶이 힘겨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 자식에게 티내지 않고 씩씩하게 삶을 사셨을 것이다. 꿈꾸던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긴긴 세월을 사시고, 이제와 어머니에게는 늙어진 다리와 뿌옇게 보이는 눈이 남겨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힘겨운 것들 역시 씩씩하게 티내지 않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힘겨운 것이지만, 힘겨운 티 내며 살아갈 것이냐, 티내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냐는 개개인의 문제이니까. 


영화속에서 씨시가 늘 이야기 한다. "씩씩하게 늙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씩씩하게 나이듦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흐르르흐르르 웃어야 할 때도 포르르포르르 웃으면서! 


이제 누군가 내 나이를 들으면 '어?'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그 만큼의 나이를 사는 동안에 우리 어머니는 그 두배가량의 시간을 살아내셨다. 씩씩하게 살아낸 그 시간 덕분에 우리 어머니에게도 기네스 존스 여사의 늙어진 목소리 만큼의 연륜의 아름다움이 있다. 삶은 결국, 살아내는 자의 것이므로 그 아름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의 씩씩한 나이듦에 보탬이 되고자 주말이면 화선지를 접는다. 어머니는 요즘 재미나게 서예를 배우고 계신다. 




Posted by Sophie03
[Story]2013. 3. 15. 00:18




오늘은 일과중에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다가,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이 났다. 일년전 오늘부터 있었던 일. 야근 후 택시에서 느꼈던 감정들, 그 이후로 지속된 일들. 2012년 스스로 대상주기에서도 당당히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그 시간들. 공든 탑은 어이없을 만큼 쉽게 무너지지만, 그래서 그동안의 시간들은 무위의 시간으로 돌아가 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 


우습게도 집에 돌아와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국민연금 가입내역안내서. 길고긴 가입개월수. 이제는 '짧고도 긴'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을 만큼 길어진 나의 가입개월수.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


그제서야 책상 위에 손편지가 눈에 보인다. 그 반가운 손글씨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뜨거워진다. 봉투를 열고 '우리'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는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였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사진을 찍어서 이 글에 넣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cloud에 저장하고 다운받아 등록하면 끝. 모바일로 바로 게시해도 되지만,  최소한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블로그 글은 왠지 꼭 키보드로 쓰고 싶어서 이런 과정을 거치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표를 붙인 손편지로 생일 축하 카드를 받아 들 때의 기분은 참 뭉클하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보낸 편지이니 그 내용이야 오죽하겠는가.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나 홀로 허허벌판에서 매서운 바람에 홀로 노출되어 있을 때도, 그 모든 것이 내 인생임을 구구절절 알고 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인데 라며 전화걸어 목소리 듣고 싶은 사람을 만들어준, 바로 그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 


내년의 오늘의 시간에는, 이러저러한 밤에 손글씨 생일 카드를 받아든 시간이 내게 존재할 것이다. 스위스에서 받아들었던 그 편지, 스위스에서 보내주었던 그 편지의 시간에 더해졌으므로,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힘든 일을 넘어서서 성숙한 것도 좋지만 덜 힘들기를 기도해준 PP님에게 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꾸벅!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3. 13. 23:16



어떤 친구 이야기. 

몇해전 어느날 결혼한 아이엄마인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너는 세상을 모른다고. 그 친구의 의미는 미혼인 나는 세상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는 직장생활을 해 본적 없는 프리랜서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일을 그만 두었었다. 나를 만날 때면 본인 위주의 약속 시간과 장소를 내세우며,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그리고 그녀만의 sweet home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녀의 불평불만을 듣던 내게, 너는 세상을 모른다고. 본인의 행복한 인생사는 내게 꽁꽁 숨기면서, 내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본인에게는 분명 즐거운 인생사가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거운 인생사의 이면에 내게도 그런 불평불만의 상황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본인에게 유부녀로서의 어려움이 있다면, 내게도 미혼녀로서의 어려움이 있고,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 이 에피소드를 다시 떠올렸었다. 멀리 보면 모두의 인생은 풍경화이다. 그러므로 멀리 보면 내 인생도 풍경화이리라. 내가 하는 고민은 내게만 심각할 뿐, 누군가에겐 배부른 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도 세상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여정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다. 버거워하며, 삐걱거리고, 제자리걸음이나 퇴보하거나 혹은 주저앉아 있다. 나의 노후를 걱정하거나 나의 외로움을 앞서 걱정하기도 한다. 물론, 내게 즐거움을 찾아주기 위해 선뜻 길을 나서기도 하고, 여행사진들을 보며 추억에 잠기거나, 한가로이 책을 읽기도 하고, 봄햇살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냥 스스로에게 주저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그저 내 인생을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그저 나의 인생이며 나의 모습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대개 양면성을 지닌다. 멀리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보면 궁상스러운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다만, 개인이 어느 측면을 더 많이 표현하느냐가 타인에게 인생을 측정당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방향만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방향은 즐거움의 공개 쪽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에 나는 긍정적이고 행복하기 위해 부지런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지인들은 잘 안 믿지만, 나는 염세주의자이고, 내향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부지런히 어디론가 떠나 한없이 게을러지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고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 쉽게 깨어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그 모든 것이 그냥 나의 모습이다. 굳이 쉽게 잠들지 못함을, 집에서 밥냄새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의 외로울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자체로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이며, 또 타인의 인생은 늘 풍경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불평불만을, 나의 어려움을, 나의 걱정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광장에서 명명백백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나의 여정이 늘 그래왔듯이, 나는 그냥 멋진 걸로, 그냥 행복한 삶을 운좋게 누리고 있는 것으로. 그저 살아가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좋아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인생. 꽃과 고통은 결국 짝꿍이다.








도장골 이야기

-부레옥잠




김신용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 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저자
안도현 지음
출판사
이가서 | 2006-06-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월시문학상, 이수문학상 등을 수상한 안도현 시인의 시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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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2. 22. 00:08



그런 날이 있다, 짜증을 견딜 수 없는 날, 못 견디게 모든 것이 버거운 날. 그런데 그런 날을 여러 사람이 함께 겪으면, 그 짜증의 응집력은 커진다. 한 사람 정도는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하고, 또 그 사람이 나이면 좋겠으나, 사실은 나도 내 짜증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였다. 짜증을 견딜 수 없는 날. 그래서 괜시리 모든 것이 억울해 지는 날. 


그런데 문득 재미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시 때문이다.







긴 호흡


- 박노해


직선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극단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사람의 길은 좌우로 굽이치며 흘러간다


지금 흐름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때

머지않아 맞은 편으로 흐름이 바뀌리라

너무 불안하지도 말고 강퍅하지도 마라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방향을 바꿀 때

그 포용의 각도가 넓어야 하리니

힘찬 강물이 굽이쳐 방향을 바꿀 때는

강폭도 모래사장도 넓은 품이 되느니


시대 흐름이 격변할 때

그대 마음의 완장을 차지 마라

더 유장하고 깊어진 품으로

새 흐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


삶도 역사도 긴 호흡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양장)

저자
박노해 지음
출판사
느린걸음 | 2010-10-1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박노해 12년만의 신작 詩集 300편의 지구시대 '노동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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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후배가 잠시 회사에 들른다고 해서 기다리며 도서관에서 휘리릭 넘겨본 시집. 이 시집이 좋아서 한 권 사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 시 사진을 찍어두었었다. 또 까마득히 잊고 오후와 저녁을 보내고, 방에서, 억울해 하던 차에, 문득 이 시 생각이 났고, 다시 읽었고, 그래서 웃었다. 

나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까? 내가 그런 오후와 저런 저녁을 보내고 이런 밤을 보내리라는 것을. 그 때에 이 시가 내게 위로가 되리라는 것을. 삶도 역사도 긴 호흡 이니 이렇듯 억울해 하지 말라는 위로가 내게 필요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그런데, 이 시의 하이라이트는 시집의 제목이다. 시 한 수 한 수 아름답지만, 시집 제목이야 말로... 최고의 한 수 이다.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2. 3. 22:09



2013년 2월 3일 눈이 내린다. 

2012년 2월 3일에도 눈이 내렸다. 그날밤에 이영춘신부님의 시신이 가톨릭대병원에서 명동성당으로 옮겨지던 앰블란스 뒤를 따라가며 때마침 시작되던 눈을 보았다. 포근했던 금요일 밤에 눈이 내리고, 그리고 다음날인 토요일/일요일에는 따뜻한 해가 떴었다. 아, 이제 봄이 오려나보다, 기대해도 좋을 그런 날씨였었다. 그런 포근한 날씨에서 내린 눈이 사실은 반가웠었다. 이영춘신부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하늘의 선물인가 싶기도 했고, 따스한 태양 역시 그러했다.


2011년 12월 27일에 병원으로 신부님을  찾아뵙고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본인의 대림절은 언제나 진통제와의 싸움이었노라, 신부님 특유의 유머가 묻어나는 그런 대화를 나웠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도 생각난다. 그 대화가 끝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1월 동안 계속 주무시는 신부님의 병실앞 복도를 서성이다가, 나는 문득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노란 편지지에 그동안 말한 적 없는 고마웠던 순간의 이야기를 적고, 제가 기대하는 기적과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기적과 하느님의 기적은 아마도 다를 수도 있겠다고, 이제 제가 기대하는 기적을 바라지는 않노라고, 하느님께서 이제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저는 늘 이 시를 읽으며, 힘겨운 순간마다 위로를 받노라고, 신부님께도 봄이 곧 올 것이라고 그렇게 적어 간병인께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나는 신부님의 부고를 들었었다.






벌써 일년. 한 사람의 결핍에 대해, 한 사제의 열정에 대해, 인간의 죽음에 생각해왔다. 그리고 오늘 이신부님께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첫사랑 282' 패밀리와 함께 명동성당에서 연미사를 보며 나는 또다시 봄을 떠올린다. 2013년의 봄을. 내 인생의 봄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깨끗한 나라(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063)

저자
이성부 지음
출판사
미래사 | 1991-11-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중견시인의 시선집. '공동산' '신생' '평야' '누가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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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참고서에 나와있던 시. 이십여년동안 힘겨울 때마다 내게 힘이 되어 준 시. 내가 생각하는 기적은 언제나 다시 봄이 돌아온다는 것. 두려움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봄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봄의 기적. 그리고 지금은 내게 절실히 봄의 기적이 필요하다.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2. 2. 00:17


'마지막'이란 단어는 늘 눈물겹다. 마지막을 이야기하며 기쁘게 웃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든 혹은 잘 지내왔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늘 아쉽게 마련이니까.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무렵 갑자기 나의 그림자가 길어진 듯 느껴지면 나는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를 한 번 이상은 되뇌이게 된다.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다. '남국의 날들을 이틀만 더 허락하소서'. 더운 여름 내내 가을을 기다리다가도 여름이 끝나는 기미가 느껴지면 늘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허락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이틀이 주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나는 그냥 그 이틀의 날들을 즐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늘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보내면서 즐기는 수 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대안은 없는 듯 하다. 

2013년 1월 31일자로 내가 4년 7개월을 몸담은 회사의 법인이 없어지고, 2013년 2월 1일자로 새로운 통합법인이 출범하였다. 사무실도 업무도 현행 유지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다가, 1월 31일이 오고 마지막날이구나 생각하니 이 곳에서 보낸 많은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나의 세번째 회사가 사라지는 순간, 마음이 좋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시를 다시 떠올렸다.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신이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에 놓고, 

벌판 위에 바람을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이 꽉 찰 수 있도록 명하시고, 

남국의 날들을 이틀만 더 허락하소서. 

완성으로 이끌어 주시어 

짙은 포도에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자는, 계속 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혼자인 자는 오랫동안 그럴 것입니다. 

깨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리고 낙엽이 뒹굴 때 여기저기 불안하게 

가로수길을 헤메일 것입니다." 


(translated by Sophie03, 자의적 해석이므로 정확성은 절대 보장할 수 없음)



마지막 연에 대해서는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는데 이번에는 좀 스산한 느낌이기는 하다.


1월 31일에 이 시를 떠올리며, 위대했던 여름을. 아직은 꽉 차지 않은 과실을, 그래서 아쉬운 남국의 이틀을 생각했다. 4년 7개월이라는 뜨거운 여름을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많이 고민했고, 많은 성장을 하였으며 나의 장·단점을 알아낸 시간이었다. 이력서를 새로 쓰지 않고 나의 네번째 회사에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끝과 시작은 언제나 함께 한다.




Herbsttag

Rainer Maria Rilke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h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1. 26. 00:02



The Chimney Sweeper 


-Songs of Innocence


William Blake (1789)


When my mother died I was very young,
And my father sold me while yet my tongue
Could scarcely cry ‘ 'weep! 'weep! 'weep! 'weep!’
So your chimneys I sweep, and in soot I sleep.

There’s little Tom Dacre, who cried when his head,
That curl'd like a lamb’s back, was shav'd: so I said
‘Hush, Tom! never mind it, for when your head’s bare
You know that the soot cannot spoil your white hair.’

And so he was quiet, and that very night,
As Tom was a-sleeping, he had such a sight!—
That thousands of sweepers, Dick, Joe, Ned, and Jack,
Were all of them lock'd up in coffins of black.

And by came an Angel who had a bright key,
And he open'd the coffins & set them all free;
Then down a green plain leaping, laughing, they run
And wash in a river, and shine in the Sun.

Then naked & white, all their bags left behind,
They rise upon clouds, and sport in the wind;
And the Angel told Tom, if he’d be a good boy,
He’d have God for his father, & never want joy.

And so Tom awoke; and we rose in the dark,
And got with our bags & our brushes to work.
Tho' the morning was cold, Tom was happy & warm;
So if all do their duty, they need not fear harm.





Songs of Innocence and of Experience: Shewing the Two Contrary States of the Human Soul 1789-1794

저자
Blake, William 지음
출판사
Oxford University Press | 1977-01-01 출간
카테고리
문학/만화
책소개
Reproduces the texts and the fif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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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사상과 문체, 표현방식 등등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William Blake는 무엇보다도 내게 innocent를 명확하게 각인 시켜준 작가이며, 산업화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전달해준 시인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종종 이 시들이 주었던 아픔이 사회생활 속에서 되살아남을 느끼곤 한다. (사실 Blake는 학부 영문학 졸업 논문의 주제였기도 하다, 지금은 찾을 수 없는 허무맹랑했을 나의 논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좋아하지만 사실 보편성이 떨어지는 Blake의 시까지 들먹이며 이 글을 작성하는 이유는 "착하다"의 의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서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Blake 덕분에 innocence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였는데 Blake가 이 시집을 통해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Innocence의 상태는 아이들의 상황으로, 방어능력이 없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어서 당연히 쉽게 동화되고 사실 교화도 되는 말하자면 Ignorant하기도 한 상태이다. 확고히 정립되지 않은 자아를 가진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세상이 무섭고도 완벽할 것이다. 이 글의 시작에 적어둔 시의 마지막 문장 "아침에 일어났고 여전히 춥지만 톰은 행복하고 따뜻하다, 자기 책임을 다하면, 두려울 필요가 없으니까요"이 잘 알려준다. 


사실 이 시집은 Innocence의 상황의 시와 Experience의 상황의 시가 짝을 이루어져 있다. 즉, The Chimney Sweeper가 한 편 더 있다.



The Chimney Sweeper 


-Songs of Experience


William Blake (1794)


A little black thing among the snow:
Crying weep, weep, in notes of woe!
Where are thy father & mother? say?
They are both gone up to the church to pray.

Because I was happy upon the heath,
And smil'd among the winters snow:
They clothed me in the clothes of death,
And taught me to sing the notes of woe.

And because I am happy & dance & sing,
They think they have done me no injury:
And are gone to praise God & his Priest & King,
Who make up a heaven of our misery.



현실에 대해 깨닫게 되며 아이는 자란다. A little black thing으로 시작된 시는 마지막을 보면, "고통의 천국을 만들어준 신과 사제와 왕을 찬양하기 위해 그들(부모)은 갔다"는 문장으로 마무리 된다. Experience가 더해지며 어른이 된다.


사실 아이는 Innocence에서 Experience의 세계로 가는 상태에 있고, 이 과정들을 거쳐 Higher Innocence의 상태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 상황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상황이며 "착하다"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이다. 흔히 순진하다고 표현되는 '무지한 순수함'을 지닌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 뿐이다. "착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기 위해서는 무지함을 넘어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사실 순진한 사람들은 위험하다. 쉽게 교화되기 때문에 쉽게 선동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1. 어느 빈민국의/어느 개발도상국의 유아노동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어른들의 착취이다. 그냥 '어린것이 쯧쯧쯧'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육체적 착취 뿐 아니라 정신적 착취를 당하고 있으니 아이들을 위해 분노해야 한다. 

2. 사회생활하는 중에 눈물로 호소하거나 쉽게 남의 탓을 하는 누군가를 설명할 때 "착해서 그래"라는 단어로 얼버무리지 말아야 한다.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는 중이라면, 무지한 순수는 본인에게도 주변사람들에게도 독이 될 수 있다. 

3. Higher Innocence의 단계에 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Posted by Sophie03
[Library]2013. 1. 19. 00:02



김수영


나에게 30원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대견하다

나도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무수한 돈을 만졌지만 결국은 헛 만진 것

쓸 필요도 없이 한 3,4일을 나하고 침식을 같이한 돈

- 어린 놈을 아귀라고 하지

그 아귀란 놈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집어갈 돈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돈

그러나 내 돈이 아닌 돈

하여간 바쁨과 한가와 실의와 초조를 나하고 같이한 돈

바쁜 돈-

아무도 정시(正視)하지 못한 돈 - 돈의 비밀이 여기 있다.


<1963.7.1>




김수영은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처음 좋아하기 시작한 시인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풀>을 읽고나서 좋아하기 시작했다. 오늘 지인을 만나 이야기 하다가 <풀> 이야기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 김수영 전집을 뒤적이며 읽다가 이 시를 읽었다. <돈>


지인과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 현대 사회의 복잡성, 방관적 구성원, 보이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

- 사상 및 논리적 사고의 결여의 지속

- 먹고 살기의 급급함

- 한국이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고, 일본이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때, 미국은 돈을 만들어 수출했다는 우리끼리의 우스개 소리가 진짜 였음을 확인하게 된 백금동전 이야기


물물교환의 시기를 거쳐 소금이 화폐의 역할을 하던 시기를 거쳐 동전이 주조되던 시기에는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을, 돈이라는 상징적인 존재, 결국은 오늘 대화의 핵심이었나 생각을 하며 옮겨 적어둔다.



김수영 전집 1(시)

저자
김수영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3-06-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개정판 편집 과정에서 시 [아침의 유혹]을 발굴하였다. 발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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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