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3.11 [Sophie' Story] 언어폭력과 항상심
  2. 2013.09.03 [Sophie' Story] 항상심 살기
[Story]2016. 3. 11. 03:17

 삶이란 때로 참으로 재미난 것이다. 한밤중에 나는 쓰고자 했던 글이 있어서 노트북을 켜고 늦은 밤 의자에 앉았는데, 미리 써둔 글을 찾고자 블로그글 리스트를 보다 보니, 다 써 놓고 공개하지 않은 글을 발견해서 그 글(☜click : "항상심 살기")을 읽게 되다가 공개로 전환하였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항상심에 대해서 생각했고, 우스운 우연의 일치처럼 최근에 내가 쓰려고 했던 주제와 항상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약간 코웃음 쳤다.


 그래, 말하자면, 나는 거의 일년전에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아서 가끔씩 그 상처를 곱씹어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른 사건으로 인해서 다시 또 그 상처가 살아났다. 역시 이번에도 말이었다. 언어라는 것은 참 미묘하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들이 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기에 본인은 기억조차 못하지만, 상대에게는 흉터가 되어 버리는 그런 말들이 있다. 나는 가끔 말로 내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이야기 하곤 한다. 나는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라서 그 표현들을 잊지 못하노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라서 남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어떤 말들에 상처받는 것일까, 어떤 종류의 말들이 내게 각인이 되는 것일까. 

 우선, 나는 "내가하면로맨스,남이하면불륜"류의 언어에 상처를 받곤 한다. 정확히 말하면, 본인의 잣대와 타인의 잣대가 다른 경우에 상처를 받는다. 본인의 가족은 중요하고 타인의 가족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본인의 약속은 중요하고 타인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본인의 감정은 사랑이지만 타인의 감정은 욕정인 사람들, 본인들이 6개월만에 결혼한 것은 사랑이지만, 타인의 6개월만의 결혼은 나이든사람들이라는 사람들... 더 늘어놔봐야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쉽게 본인에게 더 편한 잣대를, 타인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싫어해온 것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내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자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쉽사리 "내가하면로맨스, 남이하면불륜"인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 뿐이다. 

 둘째로, 가르치려는 언어들에 상처를 받곤 한다. 왜 내가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는데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보다 앞서 경험을 한 이유로, 나를 가르칠 권리를 나는 양도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나를 가르치려 드는지! 나는 어떤 관계가 그런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내가 선생으로 인정한 분들 뿐이다. 내 딸 같아서 가르치려드는 택시기사부터 시작해서 일일히 열거할 수도 없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내가 해 보니 그게 맞다"고 가르치려고 드는 그들은 그 권리를 취득했다고 생각하는데!

 셋째로, 본인의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의 언어들에 상처를 받는다. 미혼의 나에게 어떤 친구가 "너는 세상을 몰라"라고 이야기 했었다.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는, 전업주부의, 두 아이의 엄마인 그 친구의 세상을 나는 모르지만, 역으로, 대학교 4학년때부터 회사를 다니고, 또 회사를 다니고, 또 회사를 다닌 미혼의 삶을 그 친구는 알까? 그 친구는 그 미혼의 친구가 매년 연초마다 상사가 관심의 표명으로 "올해는 국수 먹여줄 건가. 자네 올해 넘어가면 위험한데"라는 말을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들어야 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을 알까? 그 친구는 그 미혼의 친구가 띠동갑 상사가 자신의 (후지지만, 친구 중 유일한 미혼이라며) 친구와 소개팅을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성희롱이 만연한 세상에 산다는 것을 알까? 두 딸의 엄마인 그 친구는 그 딸들이 겪을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알까? 이제, 결혼도 했고, 아이 엄마가 된 내가 곧 워킹맘으로 살게될 나의 삶을 그 친구는 알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소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틀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나, 관심을 가장한 관음증이나, 열거하자니 기운 빠지는 상황들이 언어폭력으로 다가오곤 한다. 언어는 입체적으로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어쩌면 언어에 의한 폭력이 가장 빈번하며 무자비 할 수 있다. 내가 일년간 언어의 상처를 곱씹으며 각인시켜온 것처럼 오랫동안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


 교훈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지만, "항상심 살기"는 사실 이럴 때 필요한 이야기이다. 타인에 의해, 상황에 의해 본인의 삶을 흔들지 말것을, 그저 담담하게 현재를 살아낼 것을, 어쩌면 그것 밖에 우리에게, 적어도 내게, 타인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다른 답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중학생 때 나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친구는 그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해서 사실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그런 말장난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순간 꺼리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상처에 대한 미안함과 알려줌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미 23년쯤 지난 지금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이라는 것이, 나는 괜찮은 표현도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니까. 내게 상처준 그들도,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모르듯이, 아마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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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
[Story]2013. 9. 3. 23:35


항상심 恒常 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때가 벌써 15년 전이다. 살면서 항상심을 가지는 이야기였는데, 당시에 내가 이해한 바로는 삶이라는 큰 그림을 두고 보면 순간순간 일희일비하지 말고 항상심을 유지하라는 이야기였다. 이십대 초반의 내게는 사실 관념적인 이야기였다.


항상심이란 단어를 내가 입 밖에 낸 것도 벌써 10년전이다. 가톨릭신자인 나는 20대 시절에 가톨릭청년성서모임을 통해 성서공부도 하고 봉사도 하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항상심이라는 단어를 접했던 때도 마르코 연수생이었던 때고, 말했을 때는 창세기 연수 봉사자였을 때였다. 연수 마지막 날에 나는 이런 내용의 말을 했었다.


"삶으로 돌아가 3박4일의 연수를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우리 모두를, 이 시간들을 전부 잊게 되실 겁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삶에 돌아가 일상을 살아내십시오. 항상심을 가지고 삶을 살다가, 어느날 삶이,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 불현듯 마음 속의 기억들이 살아나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조차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이 잔인하다는 것쯤 나도 알고 있다. 헤어짐도 잊혀짐도 쉽지 않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어릴 적에 전학을 다녔던 내가 경험으로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의 위치가 바뀌더라도, 삶의 상황의 바뀌더라도 살아 있는 한 삶이 지속된다. 삶의 시간에 매달려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한들 과거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다. 현재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써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삶 이외의 것에서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고 위로를 찾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이다. 삶에 대한 대책은 삶 안에 있다. 문제를 직면하거나 자아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을 뿐, 실제로 삶에 그 대책이 있고,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 알고 있다. 다만 그 시간들이 가져올 폭풍우가 두려워 삶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삶이 휘청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생각치 못한 따사로움에 항상심의 상태로 돌아올 수는 있게 된다. 삶 이외의 것이 아니라, 삶 내부에 있는, 과거에 존재했거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위로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 된 나의 경험이다.


삶이 너무나도 고달펐던 어느 때에, 지금 돌이켜 보면 온통 검고 어둡고 습한 기운만 느껴지던 그 때에 이대로 삶이 중단되어지기를 강렬하게 바란 적이 있다.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응축된 에너지로 그 일이 내게 당장 일어나기를 희망했던 순간이었다. 


그 때 우습게도 내게 떠오르는 것은 항상심이라는 단어였다. 그리고 항상심이란 단어는 내가 저 단어를 내뱉었던 순간을 동반해서 내게 왔다. 

"내가 항상심을 이야기 했으니, 감정이 소용돌이쳐서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이 때에도 나는 항상심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연수생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으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와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머리로 이해하고 있던 항상심은 "굉장히 따사롭고 평화로운, 혹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과 짝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 순간에 그런 순간들을 떠올렸어야 맞다. 그런데 내게 항상심은 항상심이란 단어 그 자체와 짝이었고, 약속이라는 단어와 짝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심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이십대 초반부터 "항상심을 살아야지"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항상심을 사는 것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나의 숙제이며 동시에 위로로 작용해 왔으니, 나의 위기의 순간에 '항상심'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