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내게 주는 어감... 차가운 마루바닥에 맨발로 서있는, 아직 오후의 시간에도 이미 어둠이 깔리는...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중략)
이제 너무 늦기 전에 말해 보라.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니면 당신의 이야기는 잠시 밀어 두고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보자. 감각적 자료들의 카탈로그랄까.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겠다.
p7
나는 이 첫장을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36년의 시간을 살아오며, 내 삶이 내게 특별한 만큼, 딱 그만큼 세상에는 전혀 특별하지 않음을...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던 일들이 일어나고, 당연히 나의 것 인줄로 알았던 것들이 내것이 아니었음을, 그런 인생의 힘을, 혹은 시간의 힘을 느끼고 또 깨달았었다.
폴 오스터는 현존하는 미국작가 중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이다. 십오년여 세월동안, 나는 내내 폴 오스터가 정말 그냥 미국인이라고만 믿고 있었었다. 미국적인, 너무도 미국적인. 그런데 그 "미국적인"이라는 것이 사실은 미국인에게 그런 순수함은 없었는데도, 나는 그냥 "미국인"(=황야의 카우보이 같은 아버지를 둔)이라고만 믿었었다. 유럽에서 온 유대인 아버지와 북유럽에서 태어난 어머니. 사실 폴 오스터의 나이에는 그것이 미국적인 것인데도, 나는 내내 카우보이를 떠올렸었다. 그리고, 이제야 알고 보니 그의 삶들이 그의 소설 속에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폴 오스터는 폴 오스터였다. 겨울일기 조차도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 같았다. 여느 소설처럼 그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자꾸 들어서 자서전을 빙자한 소설이 아닌가 하고 갸우뚱하곤 했다. 여러 매체들에 자서전이라고 소개되었지만, 결국 언젠가 사실 그건 소설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날 밤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종업원이 당신에게 와서 당신이 주문한 요리의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말하자 당신은 다시 거의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방향을 잃은 고뇌가 가장 명확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당신의 눈가에 차오른 터무니없는 눈물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의 상징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p156
이 문장이 어찌 자서전의 문장인가. 전형적인 폴 오스터의 작품의 문장인 것을. 그렇기에 읽으면서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신'으로 지칭되는 '폴 오스터'라는 인물에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죽 그랬다. 갈림길에 설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난다. 당신의 몸은 마음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염성 단핵증이 되었건 위염이 되었건 심장 발작이 되었건 어떤 식으로 고장이 나건, 당신의 몸은 항상 당신의 두려움과 내적 투쟁의 날카로운 예봉을 견뎌 내고 당신의 마음이 견디지 못하거나 견디지 않으려 하는 타격을 받아 낸다.
pp77-78
그래서 당신의 인생에서 여러 장소들 사이를 오가느라고, 여기에서 저기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알려 줄 정확한 숫자는 고사하고 대략의 추정치도 낼 수 없다. 비행기, 버스, 기차, 차에서 보낸 어마어마한 시간들, 시차에 적응하느라 허비한 시간들,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을 기다리며 보낸 지루한 시간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서서 가방이 굴러오기만을 기다리던 끔찍하게 지겨웠던 시간들,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만큼 당신에게 불안한 느낌을 주는 것도 없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어디도 아닌 곳에 있다는 기이한 느낌, 시속 8백 킬로미터로 나아가고 있는 비현실적인 느낌과 함께,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신 자신의 존재가 당신으로부터 천천히 빠져나가듯이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당신이 집을 떠나려면 치러야 할 대가다. 여행을 계속하는 한 여기 집과 저기 어딘가 사이 어딘지 모를 곳은 계속해서 당신이 사는 곳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pp125-126
공포는 정신적 탈주로 표현된다. 당신이 사로잡혔을 때, 진실이 너무 견디기 버거울 때,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부정의함을 더는 직면할 수 없을 때, 그래서 유일하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도망치는 것, 뒤틀리고 혼미한 상태의 숨을 헐떡이는 육체로 자심을 바꿈으로써 정신을 차단해 버리는 것뿐일 때 당신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예상치 못한 힘이기 때문이다. 어떤 진실이 이보다 더 무시무시할 수 있으랴? 몇 시간, 며칠 내 죽음을 맞는다는 선고, 당신의 삶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도에 뚝 끊어져 버린다는 말, 당신의 삶이 갑자기 몇 분, 몇 초의 심장 박동으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말.
pp174-175
소설이건, 소설이 아니건, 당신이 폴 오스터이건, 소설속 인물 당신이건 상관없이, 문장하나하나가 허투루 읽어넘길 수 없었다. 한문장한문장, 한단어한단어, 글의 시작에 적혀 있는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내게도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똑같은 방식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삶이라는 것이 다 달라 보여도 멀리서 보면 다 같이 보일 수 밖에 없으니까. 삶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고통을, 외로움을, 공포를, 두려움을 누군들 피해갈 수 있을까. 현재의 당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워도, 남들의 고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외로움을 피해낼 수는 없다고, 두려움을 어떻게든 몸이 받아내게 된다고. 결국 모두의 삶은 그런 것이라고, 겨울일기 속 당신에게 예순 네살의 폴 오스터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해도 당신이 지나간 세월에서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옛날 전화기의 벨 소리, 타자기의 딸깍거리는 소리, 별에 든 우유, 지명 타자가 없는 야구, 비닐 레코드판, (하략)
p197
이 문장들의 뒤에는 어디서든 흡연할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나온다. 피식. 누구에게나 그리운 것은 다른 법이다. 나도... 가끔 옛날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던, 너무도 cliche적인 문구,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다'의 바로 그 행위가 그립다. 어렸을 때 전화걸 곳도 없는데, 그 다이얼을 끝까지 돌리는 것이 재밌어서 돌려보곤 했었다.
그래 그렇다,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 나와 몇년을 늘 생일날에 만나던 친구가 출산을 하고 2년간 생일에 못 만나고 있다, 앞으로도 생일당일날에는 당연히 못 만날 것이다. 생일당일날의 우리만의 ritual이 이제는 불가능한데도, 삶의 과정에서 이제는 끝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메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나의 칼같은 기억력이 예전의 기억력이 아닐 때 놀란다거나, 하면서 내가 나이듦어감을 느낀다. 젊음의 생기, 청춘의 아름다움은 이제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매력적이고 싶다,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싶다. 더는 반짝반짝 하지 않지만, 은은하고 고요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 아직은 늦여름의 내가,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내게 주는 미션이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이 내게 올 때, 그리고 그것을 내가 인지할 수 있다면, 그 때의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하는 새로운 숙제를 얻은 듯 하다...
<주베르 : 삶의 종말은 고통스럽도다.> 틀림없이 지금보다 꽤나 더 나이를 많이 먹었을 그는 1815년에 예순한 살의 나이로 그 말을 쓴지 1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삶의 마지막에 관하여 다르면서 훨씬 더 도전적인 어구를 적었다. <누구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문장에, 특히 괄호 속의 말에 감동한다. 그 말을 보기 드문 세심한 정신,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이 특히 나이든 사람은, 노쇠해져서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보여준다.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 마지막이 고통스럽건 고통스럽지 않건 마지막에 가서 사랑스러워진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성취는 없을지도 모른다.
pp23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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