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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17 [Sophie' Story] 명쾌한 이진법
[Story]2013. 4. 17. 00:23


"세상 모든 일은 0과 1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스물네살무렵 친구가 한 말인데,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저런 이과적인 사상이 꽤 신선했다.
그로부터 5,6년쯤 지나,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향후 계획을 묻자, "그저 흐르는 대로"라는 대답을 했었다. 놀란 나는 네가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고 이야기 했고, 살다보니 이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더라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전형적인 이과 출신의 친구가 삶의 사상을 바꾸게 되었던 그 많은 스토리들을 알고는 있지만, 옮길 이유는 없다. 나의 삶의 흐름도 그러하니까. 깔끔하게 계획하고 순차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저 전략보고서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이다. 살다 보면 미세한 나비의 날개짓으로 바뀌게 되는 일들이 많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종종 수학문제를 풀거나, 숫자 놀이를 하곤 한다. 세상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명쾌한 풀이와 해답이 있으니까, 골치 아픈 일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보통은 스도쿠를 하며 명쾌한 즐거움을 손쉽게 획득한다. 사실 옆에서 누군가 스도쿠를 풀고 있을 때 지켜보는 것도 재미나다. 머릿속으로 조합을 맞추며, 훈수 두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잡아 마음 속으로만 훈수를 둔다. 단순하게도 나는 스도쿠를 눈이 아파서 눈물 흘리면서도 한다.

그런데, 더 쉽고 간단한 놀이가 있다. 요즘 굉장히 산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좋지도 않은 컨디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서, 밤에 잠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을 나가서도 나를 떠나지 않는 복잡한 문제들이 나를 죄어왔고, 아름다운 벚꽃나무 아래를 걷는 일이 무의미하여서, 결국 간만에 나만의 숫자놀이를 하며, 걷다 보니,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마치 오늘밤의 봄바람처럼.

준비물은 운동화를 신는 것 뿐. 할 일이라곤 주차장을 산책하는 일이다. 그저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하며, 번호판을 본다. 4개의 숫자를 더한다. 동시에 4자리 숫자니까 덧셈하면 4로 나뉘게 되는지 확인한다. 걸음의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걸으며 번호판을 보고 숫자를 더하면서 덧셈의 결과가 4의 배수가 될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한두바퀴 돌면 주차된 차의 번호들의 조합을 다 파악하여 재미가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4개의 숫자를 4개의 연산자를 활용하여 10을 만드는 수식을 짜면 된다. 3618을 예를 들어 보면 덧셈결과는 18, 6이 4로 나뉘지 않으므로 4의 배수가 될 수 없고 (8은 4의 배수, (1+3)도 4의 배수 이므로 6이 4의 배수인가만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동시에 10을 만든다면 (8/1)+(6/3)의 수식을 만드는거다. 일렬주차의 경우는 몇 걸음의 여유가 있으므로 계산이 쉽지만, 전면주차/후면주차의 경우에는 단시간 내에 이런 수식을 계산해야 하니, 내 머릿속은 어느새 이진법의 영역에 속해있게 된다. 하다보면 바로 옆에 같은 덧셈의 결과값을 가진 차가 주차되어 있지만, 10을 만들 수 있는 숫자와 없는 숫자가 존재하기도 하고, 은근 총합이 27을 넘어서는 경우는 적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러한 명쾌한 이진법의 세상은 금세 끝난다.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인 것도 맞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일상의 힘은 굉장히 크다. 그리고 일상은 언제나 명쾌하지는 않다. 사실 0과 1로 설명되지 않으니 늘 명쾌할 수가 없다. 명쾌한 계획, 속시원한 실행은 0과 1의 세상에서만 가능하니까. 그렇지만 가끔 이진법의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숫자가 주는 단순함은 때로 위로가 되니까.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