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끊기]2013. 3. 30. 01:50



개인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대책없이 지르는 편인데다가, 다소 엉뚱한 편인 나는 설날당일 저녁에 이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중에, 스위스의 각 도시들은 카니발을 했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사순절"동안의 금욕적인 삶 이전에, 즐겁게 먹고 마시는 축제이고, 그래서 카니발 시즌에는 매우 기름진 카니발용 과자/빵을 판매한다, 고 했었다. 운좋게도, 내가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에 카니발 기간이 있었고, 우리들은 각 도시들의 카니발 날짜를 알게 되어, 우리도시 카니발뿐 아니라 옆동네 카니발에 기차타고 놀러도 갔었다. 그 조용하던 스위스 거리에 모든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나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시를 밤새 만들었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한껏 분장한 스위스의 청년들이  겨울의 정령이 물러가고 봄의 정령이 오는 것을 반가워하기 위해 카니발을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만은 목적이 무엇이 중요한가, 모두가 살아 숨쉬는 도시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관광지가 아닌 도시에 동양여자가 돌아다니면 '쟤는 뭔가' 하고 말도 걸고 카니발 설명도 해주고 함께 사진도 찍고, punctual한 스위스 사람들이 일탈하는 그런 날이였다.












(깨끗하게 조용한 St.Gallen이 단 하루 시끄러워지는 날! 

밤새도록 행진무리가 돌아다녀서 잠들지 않는 토요일이었다. 

그래도 역시 축제의 중심은 아이들! 

2004년 2월 @ St.Gallen by IXUS400)



그런 토요일밤을 지내고 일요일에 거리에 나가면, 마치 꿈을 꾼 듯 깔끔해지고, 다시 punctual한 스위스 사람들이 조용히 걸어다니고 있었다. 기름진 디저트류를 먹던 카니발 기간이 지나면 다시 담백한 일상의 맛으로 돌아온다던 "글로 배웠던" 그들의 문화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설날아침과 점심식사를 거하게 하고 저녁을 굶다가, 나도 카니발 같은 폭풍흡입을 하였으니, 밀가루를 끊어야 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곧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였고, 5주후에는 내 생일이 있었고, 7주를 꽉 채워보내면 8주째 일요일에는 부활절이니, 밀가루를 끊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 시행했다. 어차피 내가 안 먹으면 되니, 전략도 계획도 설득도 필요없이 시작하면 되었다. 카니발 다음날 아침의 거리처럼, 순식간에 그냥 그렇게 결정하였다. 


밀가루를 안 먹는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왜 끊었는가'와 '무슨 효과가 있냐'는 질문들이었다. 사실 이 질문을 너무 자주 받아서, 인터넷에서 밀가루 단식의 효능에 대해서 검색해서 알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단식의 이유를 위와 같이 설명하면 대개 '뭐 그런 이상한 이유가 있냐'는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저런 식으로 끊으면 기대효과가 무엇이었는지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인 행동에 기대효과와 교훈을 반드시 가져야 하나? 하는 생각을 꽤 많이 한 요즘이었다. 


그래도 친절하게 기술하면, 2년여전부터 피부가 가끔 뒤집어진다. 문제는 원인을 모른다는 것인데, 스트레스받거나, 과로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환절기이거나, 장마철이거나 등등의 여러상황들에 여지없이 피부가 뒤집어진다. 약사친구는 내게 "환경을 바꾸지 않는 이상 완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려서 나를 좌절케했고, 피부과 약도 먹으면 좀 가라앉지만, 위의 상황들이 나타나면 여지없이 뒤집어진다. 그러다가 알러지성 비염이 심해서 밀가루를 끊었더니 요즘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내게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것 뿐이다. 


그런데 사실 알러지성 비염 환자의 증언과 같은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전히 피부는 조금씩은 가렵다. 하지만 상태가 많이 완화되었고, 그래서 나름 환절기를 무사하게 넘겼다. 생각지 못했던 효과는 손이 붓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먹을 쥘 때 부은 느낌이 없다. 그리고 환절기마다 기승을 부리던 여드름도 거의 없이 지나가고 있다. 몸도 가벼워지고, 자연스레 건강한 한식식사를 열심히 하게 되고 과일도 챙겨먹게 된다. 그래서 행복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효과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먹으라고들 많이 이야기 한다. 그런데 사실 밀가루를 끊으니 심리적으로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 밀가루를 끊으면, 국수/라면/짜장면/과자/피자/햄버거/빵/파스타/전 등 흔히 생각하는 밀가루 음식을 못 먹을 뿐더러, 사실, 아이스크림"콘"/어묵/에너지바/튀김/딤섬/골뱅이"소면"/시리얼 등 의외의 것들도 못 먹게 된다. 수많은 밀가루에 그냥 얽메여 살았었다. 스스로 그것을 자각할 이유도 시간도 없이 그냥 먹고 싶을 때 먹는것이라고 생각햇지만, 실제로 밀가루에 삶이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3주동안은 매일매일 먹고 싶은 밀가루 음식이 있었고, 때마침 윤후의 짜빠구리 먹방으로 평소 잘 안 먹는 라면도 너무나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먹고 싶더라도, 그냥 그건 내가 못 먹는 거다,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밀가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을 확보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냥 계속 밀가루를 안 먹는 음식으로 지정하고 살아볼까 한다. 한달에 두번정도 먹고 싶은 밀가루 음식을 섭취하더라도 말이다. 카니발 후의 그저 담백한 일상을 일년 내내 살아내듯이 나도 엉뚱하게 밀가루를 안 먹으면서 담백한 일상을 보내는 것, 깊은 생각없이 Lent Resolutions으로 시작된 밀가루 단식이 2013년 New Year's Resolutions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