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2012. 12. 13. 00:14



오늘 드라마 '보고 싶다'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성폭행당해 자살한 보라의 어머니와 성폭행 당한 후 행방이 묘연한 수연의 어머니의 만남을 보다가, 수연의 어머니가 '그래도 죽이지는 말지'하는 이야기에 울컥 눈물이 흘렀다.


사실 어제 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을 보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양일 닮은 이야기가 드라마에 나왔다.







나는 5살 때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해서, 꽤 오랫동안 집단사회에 소속되어 있어 왔다.

짧고 긴, 작고 큰 사회들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이제껏 깨우쳐 알게 된 것은 남의 가슴에 상처주지 말라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관없이, 말로 눈빛으로 한숨으로 무시하는 몸짓으로 그 어떤 것으로 상대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몰랐다는 핑계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변명도 소용 없다. 한번 난 상처는 되돌릴 수 없으므로.


내가 말로 상처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중학생 때 였다. 그 친구는 언제나 따라잡을 수 없었던 완전한 일등이었는데 어느날 내가 하는 말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친구의 용기있는 한 마디에 나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누구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구나, 본인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해자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깨달았었다.





사실, 상처를 화두로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비단 "누구라도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는 돌고 돌아 본인에게 회귀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제석의 공익광고 이미지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사실 나는 작년이던가, 이 이미지를 처음 보고, 오이디푸스를 떠올렸었다.


오이디푸스를 읽은 이후로 나는 오이디푸스의 화살에 생각이 집중되어 왔다. 보통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는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라던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이야기 하는데, 나는 오이디푸스의 화살이 결국은 돌고 돌아 결국은 본인 자신에게로 향하고 말았구나, 본인에게서 나간 어떠한 화살이라도 결국은 본인에게 되돌아 오고 만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화살은 가속이 붙어서 피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경우들을 종종 보아왔다. 예를 들어 설명할 성질의 것들은 아니지만, 재미난 것은 화살을 맞은 사람이 매트릭스처럼 날라오는 화살을 잡아 다시 던지는 상황은 보통 드라마에서는 일어나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그 화살을 쏜 사람의 명성이 멀리 퍼져나가 언젠가 어떤 방식이든 상처를 받게 되던가, 혹은 명성이 퍼져 나가지 않더라도 화살을 쏘는 사람의 인품으로 인해 종국에는 화살받이가 되는 경우가 있곤 했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따로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언젠가 풍문으로 가해자의 소식을 듣게 된다. 


대개의 경우 오이디푸스의 헤어날 수 없는 신탁의 운명처럼, 결국은 남에게 준 상처는 결국 돌고 돌아 본인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보통은 몇갑절 강한 화살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언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몰랐다고 변명해도 할 수 없다. 일단은 상대방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상처란 대개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가해자는 할 수 없다. 오로지 피해자만이 어느 순간 용서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용서를 했다고 하더라도 상처로 인한 흉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락방에 먼지가 쌓이듯이 시간에 의해 덮여지는 것 뿐, 언제고 상처는 다시 되살아나 흉터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 용서도, 상처도, 흉터도 다 피해자의 몫이다.


가해자는 다만, 언젠가 본인이 상대에게 한 일이 어떤 것인지 비슷한 상황으로 당하게 된다. 남의 가슴에 못 박은 사람은 언젠가 대못 박히게 되는 법이다.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화살은 되돌아 온다. 


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의 앤서니 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일을 위해 열정을 불살랐다고 핑계 대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지 말아라, 너의 열정이 누군가의 마음을 화상입게 하였으며, 너의 최선이 누군가에게 평생의 한을 남겨두었으니까.



중언부언하였으므로, 정리하자면,

첫째, 의식중에든 무의식중에든 타인에게 입힌 상처는 언제나 돌고돌아 본인에게 돌아온다. 본인의 상황의 탓을 하더라도 이미 상대방은 상처를 입었으니 결국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자나깨나 조심해야 한다.

둘째, 더 중요한 메세지는, '드라마의 제왕'의 '오진완'처럼, '보고싶다'의 '보라엄마'처럼 직접 복수하려고 하지 말아도, 언젠가는, 어떻게든, 반드시 가해자가 더 큰 상처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니, 가해자에게 마음 쓰는 시간에 차라리 본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상처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용서도 망각도 본인을 위한 것이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주변의 모든 현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내가 해 보니, 이렇게 마음 먹는 것이 본인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한 번 되새긴 그런 교훈이다.











Posted by Sophie03
[Pause]2012. 12. 7. 00:38




12월의 겨울은 1월의 겨울보다 언제나 더 춥다. 

온도의 차이보다는 추위에 아직 내성이 생기기 전의 체온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져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2월의 여행은 여느때의 여행보다 변수가 하나 더 있다. 추위.

여행지에서의 추위는 늘 이건 좀 의외인데, 라는 생각의 것들을 선사해 준다.




보통 상상하는 12월의 여행지의 하늘은 이래야 한다. 

흐리거나 어둑하거나, 그래서 여행자로서의 신분을 망각한 채, 연말을 맞이하는 일상의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다.



           (2010.12.7 taken by iPod Touch. 뉴욕 센트럴파크)


               


          (2010.12.7 taken by iPod Touch. 뉴욕 센트럴파크)





하지만 눈/비가 오지 않는 한 12월의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는 하늘은 이런 경우가 잦다. 

춥기 때문에 쨍하게 맑은 하늘. 추울까봐 12월에 여행을 가지 않을 이유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하늘. 

다들 출근하는 도시에서 여행자처럼 거리를 걸어다니는 여행지의 오전의 여유로움. 

그래서 카페에 앉아 유유자적하거나, 그림 하나에 집중하다가 긴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여행자만의 시간을 살아내게 된다.




         (2010.12.8 taken by iPod Touch.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가는 길)


         


12월의 여행이 특별히 재미난 것은, 일상의 pause 버튼이 확실히 눌러진다는 데에 있다. 

일상에서 정확히 분리되어 나와, pause 상태의 본인을 마주함과 동시에 

지나온 일년간의 시간과도 쉽게 마주하게 된다. 

송년회의 시간을 통하지 않고, 쨍하게 맑은 하늘을 마주하며, 지난 일년을 정리하게 된다.




나는 사실 추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 특히 한 해의 첫 추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한다.

그러니 내가 12월의 여행을 달가워 할리 없다.



그렇지만, 12월 여행의 묘미는 분명하다. 첫추위를 여행지에서 맞이하며, 더 쉽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렇기에, 여름에도 겨울에도 정신을 차리기 힘든 버거운 순간이 찾아올 때, 12월의 여행을 떠올린다.

그곳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12월의 쨍하게 맑은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12월 여행의 묘미는 분명하다. 





 # 추워서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음악을 듣던 채로 iPod Touch로 찍은 사진들임


Posted by Sophie03
[Think+ing]2012. 12. 6. 00:34








TEDxSeoul의 김영하님의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강연을 처음 접한 건 성수선의 책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에서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멀티미디어 링크가 맘에 들게 걸리지 않으므로, URL 링크만 걸어둔다)



 

 소설가 김영하는 테드엑스서울(TedxSeoul)에서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멋진 강연을 했다.


마법의 질문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나 연극을 좀 해볼까 봐, 뭐 구청에서 하는 연극학교가 있는데 가볼까 봐, 라든가 이탈리아 가곡을 배울까 봐 그러면, 어 그래? 연극? 그거 해서 뭐 하려고 그래? 마법의 질문이에요. 해서 뭐 하려고 그래?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해서 뭘 하려는 게 아니죠.
예술은 최종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고 우리가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술과 약물의 도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기표현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런 실용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담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 그냥 즐거워서 하는 거야, 재밌어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 내가 좀 먼저 할께, 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pp123-124)



이 부분에 동의해서 이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는데, 몇몇가지 생각들을 했고, 그 중 세가지를 기록해 두려고 한다.



첫번째는 모두를 웃게 만든 이 구절.

웃으면서도 가슴 찡하고, 동의하고 싶지 않아도 동의하게 되는 이 문장을 기록하고 싶었다.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미셀 투르니에-






두번째는 성수선씨가 옮겨적은 저 구절,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하는 부분에 대한 동의.


내가 최근 1~2년간 그냥 재미있어서 한 일.


- 와인스터디 : 이유도 간단하다, 친구가 와인이 궁금하다고, 친구들끼리 와인아카데미를 같이 다니자고 했는데,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한 클래스는 너무 초급이라, 내게는 지루할 것이 뻔하고, 무엇보다 와인 리스트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정도는 우리 셋이 강의료만큼의 돈을 모으며, '더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 내가 공부 시켜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 후에, 4번의 강좌, 8병의 와인을 준비해서 마셨다. 실라부스를 만들고, 매주 여러권의 와인 책들을 섭렵하고, 강의안을 가지고 가고, 와인을 설명하고. 적절한 가격의 귀부와인을 찾기 위해 와인고수님들을 괴롭혀서 직구하고, 샴페인은 오랜숙고 끝에 벨오뽀끄를 마시고, 마실 와인에 대해서 추가로 알려 주고. 그냥 재미난 시간이었다.  


- 일드프랑스 지역의 고딕건축의 역사와 특징 강의 하기 : 그냥 대충 떼워도 되는 '그냥 아는 거 이야기하기' 시간에 갑자기, 문득, 나의 일드프랑스 지역의 고딕건축 탐방기를, 강의 형식으로 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번의 주말 내내 책을 보고 사진을 정리하고 강의안을 만들어서 강의를 했다. 역시 그냥 재미있었다.


나에게 무엇이 되돌아와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그 시간이 뿌듯해서, 잠이 줄어서 몸이 피곤해도 마음이 즐거움의 상태를 오래 지속하니까, 그래서 하는 일이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잠자는 시간 쪼개서 독일인의 사랑을 읽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읽었던 때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붕붕 떠다닌다. 그냥 재미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세번째는 '다중의 정체성' 표현.


초기에 페이스북을 시작하고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이 '모두가 친구인 컨셉'이었다. 찾아보니, 주커버그는 인간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본 사상이라고, 그것이 페이스북에 반영된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인간은 다중의 정체성을 가진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직장동료에게, 어떤 그룹에서나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그 그룹 내에서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그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다중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이런 다중의 정체성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생성된다.


그런데, 스스로에게도 다중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중의 정체성으로 다가가듯이, 스스로에게도 다중의 정체성의 한 부분만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바꿔 말하면,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 말고, 존재 그 자체로서의 스스로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늘 이야기 한다. "시간이 없어. 여력이 없어. 나는 돈을 벌어야 하고. 심지어 나는 빚도 있어."

그런데 사실 좀 지겹다. 이런 문장은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을 위한 변명이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변명으로는 부적절하니까.

삶은 언제 종결될지 모른다, 천재지변이든 인재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삶은 언제든 종결될 수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10분전에 성수대교를 건넌 이후로 깨닫게 된 사실이고, 우울했던 어떤 순간을 벗어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다중의 정체성의 단 한 부분이라도 존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김영하님의 표현 대로, 자기만의 예술을 하는 순간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가 어떤 다중의 정체성 중에 하나만이라도 예술가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은 그 자체로 목적이므로!
















사소하고 잡다한 이야기 하나 더.


대학에 와서야 십여년만에 다시 만난 친한 동생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말. 

본인이 시각디자인학과를 전공하듯, 당연히 내가 미대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모두가 내 그림은 그냥 그렇다고 해서 미술을 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했더니,

나의 색감은 훌륭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미술을 전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추상화적인, 원색의 색감을 사용했었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 그림은 그냥 그렇다는 주변의 평가를 그냥 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내 안의 작은 예술가는 기지개 한 번 못 켜보고 붓을 놓고 말았다는, 사소하고 잡다하고 슬픈 이야기.






--------------------------------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저자
성수선 지음
출판사
알투스 | 2012-11-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당신을 향한 내밀한 고백이자 나를 향한 솔직한 독백!밑줄 긋는 ...
가격비교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