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se]2013. 11. 21. 23:30


나는 좋아하는 것, 행복하게 하는 것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겨울산책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있다. 나의 모순이기는 한데, 우선 나는 추운 날씨를 잘 못 견딘다. 기본적으로 체온이 높은 편이 아니고, 외부의 찬 공기(에어콘/찬바람)에 의해 쉽게 한기를 느끼는데다 바로 회복을 못 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어떤 밤에는 자다가 급히 추위가 느껴지면 임기응변으로 목과 발에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어야 덜덜덜 떠는 것을 그칠 수 있다. 어린시절 6년동안 강원도에서 살았는데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체질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좋아한다. 말그대로 콧끝시린 그 시간의 공기를 사랑한다. 특히 겨울산책에서 느끼는 그 상쾌함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이다. 아침 출근길에는 너무 추워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걸어가는데, 저녁 퇴근길에는 약간 룰루랄라하면서 밤에 잠시 산책을 나가볼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산책을 나가면 그네도 탄다. 찬바람을 가르며 그네를 타는 기분은, 한겨울 여의도고수부지에서 아이스크림 먹기를 즐기던 나의 중학생 시절의 행복감과 맞먹는다. 


그래서 주말에 눈을 뜨면 어서 산을 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 하기야 4계절 내내 늘 다른 핑계로 산을 가지만,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에 산을 가기 위해서는 거쳐야할 단계가 조금 길다. 일단 눈을 뜨고 산을 가야지 마음 먹지만, 이불에서 나오는 순간 추워서 가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상쾌한 겨울산책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온갖 중무장을 하고 산으로 간다.


겨울산책에는 늘 그리움이 묻어 있다. 알프스 겨울 공기에 대한 그리움, 눈길을 걸어 산을 오르며 외로움을 달래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이 스위스가 아니라 서울이었어도 겨울이 주는 외로움을 느꼈겠지만, 그 때는 그저 외로운 이십대였다. 그래서 St. Gallen에 머무는 주말이면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도시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아래와 같은 등산로의 초입을 지나 오르기 시작하면 숲이 나오는데, 아쉽지만 숲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이 등산로 입구를 참 좋아했었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갈 때 이상한 온기를 느끼고 했다. 물론 나이를 가늠할 수 없고 St.Gallen에는 희귀한 동양인 여자애가 지역민처럼 입고 산을 오르는 풍경이 신기하여서인지 눈인사를 잘 해줘서 일 수도 있다. (반대로 거리에서는 관찰의 대상이었다)





스위스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인 St. Gallen은 양쪽에 산을 두고 긴 도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쪽 산 중턱에 내가 살던 집이, 반대쪽 산 중턱에 내가 다니던 학교가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산에 오르면 우리집 지붕도 보이고 멀리에 학교도 보였었다. 






아래 사진의 평평한 곳은 수영장이다. 아쉽게도 나는 겨울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눈덮인 수영장만 보고 돌아왔다. (사실 산책로 옆을 지나던 승마하던 사람들 사진을 넣고 싶었지만 찾아지지가 않아 수영장 사진으로 대체)



(네장의 사진 모두 2004년 1월, St.Gallen, IXUS400)


내가 만난 스위스 사람들은 "감기 걸리면 늘 숲에 가야 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 자연의 치유력을 믿으라"고 이야기하며 집에 있는 나를 등떠밀어 나가게 하거나 굳이 밖으로 불러내서 숲으로 데리고 갔었는데,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내가 알아서 산에 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숲에 다녀오거나 산에 다녀오면 늘 감기가 호전되어 있었고, 나도 그 때부터 자연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치유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서울에서도 감기기운이 있을 때 종종 산책길에 오른다. 많이 껴입고 핫팩을 붙이기도 하고, 장갑도 두겹씩 끼는 등의 대비를 충분히 하고 산에 다녀오면, 감기기운이 물러간다. 상쾌한 기분은 덤이다. 


최근 2~3년간 알프스의 겨울이 무척이나 그립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 펑펑 내리는 눈, 그 핑계로 산책후에 마시는 스위스 우유에 탄 핫초코. 그 상쾌함. 이상하게 겨울에 왔던 폭풍도 그리운 것을 보니, 겨울 스위스에 다녀오긴 해야 겠다. 




Posted by Sophie03
[Pause]2013. 9. 1. 09:30



"이튿날,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 해변을 따라 빗속을 걸어 등대까지 산책을 하던 중" (p10)


이 구절을 읽고, 나도 모르게, 바르셀로나 해변에 가 있었다.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순간 나는 바르셀로나 해변가의 빗속에 서 있었다.


2011년 2월에 나는 출장으로 바르셀로나에 가 있었다. MWC 기간이니, 당연히 시내의 호텔은 가격이 너무 비싸 회사의 출장비 규정에 따라 시내에 투숙할 수는 없었다. 어렵게 잡은 호텔이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40~50분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그 때가 바르셀로나 세번째 방문이었는데, 처음으로 외곽에 호텔이 잡혀 처음에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별장과 같은 2층집들을 지나면 바다에 나갈 수 있었다. "덤"과 같은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 비행기라서 오전 동안 호텔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나는 불현듯 비오는 바다 생각이 나서 홀로 바다로 나갔었다. 우산이 바람에 휘어질 정도의 날씨라서, 바다에 도착하니, 강한 파도 소리와 비 소리, 그리고 우산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나... 나는 그 바닷가에서 일출도 봤고, 그 시간이 꽤 감동적이었지만, 사실 그 시간이 더 좋았다. 카메라를 안 가지고 나가, 아마도 당시에 가지고 있던 폰으로 사진을 찍었겠지만, 사진으로 남겨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던 응어리가 바람에 풀어져 날아가는 듯 했다. 살면서 간직하고 있던, 나도 모르는 설움이 어느 순간 흩어져 나는 무장해제가 되고 말았다. 몸을 가누기도 어렵던 그 바람 덕분에, 나는 자연의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여름거짓말』에서 저 구절을 읽는 순간, 잊고 있었던, 그 시간의 바람 소리가 되살아났고, 그 때의 위로를 다시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여름 거짓말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7-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올 여름 놓쳐서는 안 될 걸작 중의 걸작” _SWR(Sud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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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학부 시절에 읽은 이후에 참으로 오랜만에 읽었다. 『여름거짓말』은 7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첫번째 순서로 수록된 작품이 "성수기가 끝나고"이다. 성수기가 끝나고 바닷가 휴양지로 휴가를 떠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 비오는 해변을 가더니, 일출을 보러도 바닷가에 간다.


드디어 그는 해변에 도착했다. 태양은 황금빛으로 솟아올랐다. 바다도 붉게 들끓고 하늘도 벌겋게 타올랐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이 이어졌다. 결국엔 구름이 모든 것을 꺼버렸다. (p29)


태양의 일출이 주는 위로. 그 찰나의 순간을 기다리는 영겁의 시간. 일출을 기다려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다른 색인 이유, 혹은 다른 색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다. 










30분 동안 찍은 사진들 중에 추린 사진들. 2월의 바르셀로나의 겨울의 바닷가에서의 한시간여, 태양을 보던 순간의 추위는 저 황금빛 태양으로 사라졌다. 삶의 찬란한 순간들에 숨겨진 어둑어둑한 시간에도, 어쩌면 태양은 늘 이렇게 감동적으로 우리위로 떠오르고 우리를 보듬어 주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바다와 태양 뿐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들을 언제나 선물하면서! 






Posted by Sophie03
[Pause]2013. 6. 28. 00:00



태양이 그리운 여름날을 보내고 있다. 희뿌연 비닐하우스에 들어온 것처럼 하늘은 잿빛이고, 공기는 육중한 그런 여름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인지 장마철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태양이 쨍한 하늘이 보고 싶어서 나는 내내 이 사진을 마음으로 떠올렸다.



(2006년 8월, 나파밸리, IXUS400)



2006년 캘리포니아 친구네 집으로 휴가를 갔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물리적으로는 뜨거웠지만 정서적으로는 따뜻했다. 하늘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이상하게도 나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실 아무도 물어보지 못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꿈꿔도 됩니다 ③의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3가지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나의 대답 중 하나는 "하늘"이다. 나는 사실 태양이 있는 하늘도 구름이 가득한 하늘도 비를 내리는 하늘도 다 좋아한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순간순간 본연의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하늘을 만난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고 바로 대답할 수 없을 때 나는 캘리포니아의 이 하늘을 떠올린다.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나를 보듬어주는 듯한 그 하늘. 이 사진 한 장으로 문득 포근해지는 밤이다. 


# 태양빛에 한올한올 보이는 해바라기의 꽃잎을 보자 이상하게도 to be continued 상태로 두고 있는 꿈꿔도 됩니다. 시리즈를 다시 재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글은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있는 것이므로. 


Posted by Sophie03
[Pause]2013. 6. 11. 00:01



얼마전 결혼한 고등학교친구가 부인과 함께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3개국 여행을 떠나겠다고 여행일정을 게시판에 올렸는데, 찬찬히 도시들을 살펴보고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스케쥴의 일부 수정을 이야기 하고는, 마지막으로 Bern에 들려가는 루트보다는 Zürich를 들려가는 루트가 더 좋다는 충고를 하다가, "그리고 나는 베른보다 취리히를 더 좋아해"하고 말하고는,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은 이미 취리히에 다녀온 듯 하다.


내게 종종 서부유럽의 일정을 말하며 추천도시를 말해 달라고 하는데, 내가 답을 내놓는 기준은 단순하다. "내가 다시 가고 싶은 곳인가?"의 질문을 통과하여야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아"하는 중립적인 대답이 아니라, "나는 그 도시가 좋아"라는 단호한 선택적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베른이 아니고 취리히이다. 베른이 매력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둘 중 하나라면 당연히 취리히이다. 


블로그 초기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취리히는 걷는 낭만이 있는 도시이다. Zürich Hauptbahnhof에서 내려 길을 건너서 들어서면 전차가 다니는 Main Street로 접어들 수 있다. (사진 속의 거리 click물론 그 길을 건너면 대형마트가 있어서 나는 늘 그곳에 들려서 내가 머물던 St. Gallen에서는 구하기 힘든 잡화들을 구경하거나 구매하여서 늘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다. 


취리히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길을 강가의 거리이다. 이 거리를 걷는 평안함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도 맛볼 수 없는 평안함이다. 취리히는 분명 대도시이고, 비싼 도시이고, 분주한 도시인데도, 어느 도시의 어느 강가에서도 만날 수 없는 평화로운 고요함이 존재하는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두번째 사진의 길을 걷다 보면 작은 스위스기념품수공예점이 있었는데, 

창가에서 그 작품들을 늘 구경하곤 했었다. 2004.3월, IXUS400)

 



사실 이 사진만 봐서는 나무가 앙상해 보이지만, 실제로 겨울에, 그것도 눈이 오는 취리히의 강가는 이렇다. 


(2004.1월, IXUS400)




(강가 사진은 아니지만, 눈오는 취리히 골목골목. 2004.1월, IXUS400)



사진들을 보고 글을 쓰다 보니 또다시 나는 이미 취리히에 와 있는 듯 하다. 그 돌길을 걷는 낭만, 취리히중앙역의 공기, Merkur의 초콜렛향기, 그리고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취리히에서 살며 St. Gallen으로 강의 오던 교수가 늘 "취리히는 너무 비싸. 작은 방 뿐인 집을 빌려서 사는데 집값이 얼마야. 취리히는 너무 비싸. (여기까지는 인상쓰며 이야기 하고는,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하지만 취리히는 너무 좋아. 취리히를 떠날 수는 없어"라고 말하곤 했는데, 매번 취리히를 방문할 때마다, 나도 취리히에 한번 더 반했다. 교수의 말처럼 돈이 많아지면 꼭 살아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그러니, 베른과 취리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취리히를 추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 나는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또 언젠가 취리히에 가고 싶을 때 그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달래애 하니까. 

하지만 사진 두장은 덤으로! 오늘은 내 성격과 달리, 강하게 한 쪽을 선택한 날이니까!




(눈오는 취리히의 야경. 2004.1월 IXUS400)


(바로 그 스위스기념품수공예점! 2004.1월 IXUS400)





Posted by Sophie03
[Pause]2013. 3. 1. 01:45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 이바라키 노리코 

바삭바삭 말라 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점점 까다로워져 가는 걸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건 어느쪽일까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나는 걸 가족 탓이라고 하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었던 것은 나

초심이 사라져 가는 걸 생활 탓이라고 하지 마라
애당초 의지가 허약했을 뿐

안된 일을 모두 시대 탓을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아 






올 겨울 친구의 싸이에서 보고 옮겨적어두었는데 계속 생각나는 시이다. 

법인 통합 이후 회사의 절친무리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내상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다들 일 잘 해서 인정도 받고 회사에 로열티도 높은 사람들인데도 내상은 비껴갈 수 없는 것인 듯 하다. 나도 아직 작년의 고통을 모두 극복하지 못 했는데 새로운 상처를 안고 한 해를 시작하고 있는 듯 해서 다소 자신 없고 그래서 나의 감정에 numbness하고 싶은 게으른 심리가 있다. 오늘도 이렇고 저렇고 한 하루를 보내고 나서, 방에 앉아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 시집을 뒤적이게 되었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에 스스로 물주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시집을 휘리릭 읽는 것이니까. 그러다가 이 구절을 읽었다.







사진관 진열장

아이 못 낳는 아낙이

남의 아이 돌사진 눈웃음지며 들여다본다.







순간의 꽃

저자
고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1-04-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958년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
가격비교






아차차. 오늘의 시집 읽으며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에 스스로 물주기는 실패이다. 나의 심정이 아낙의 행위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니까. 오늘 있었던 일 중에 하나가 떠오르며, 나도 순간 남의 아이 돌사진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욕심 낸다고 해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사진관 진열장 앞에 서서 남의 아이 돌사진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는 것. 부러운 것. 아차차 오늘의 시집 읽으면서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에 스스로 물주기는 실패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사진을 봐야 하는 날. 책장에 꽂힌 시집 하나를 꺼내들고 휘리릭 읽어내리는 그 마음으로, 저장된 사진들을 휘리릭 보다가, 오늘 당첨된 사진은 '바르셀로나 구시가 오래된 우체국 건물이 있는 광장의 밤 하늘 사진'이다. 저 돌길을 걸을 때의 습도, 온도, 바람, 내 발걸음 소리. 촉촉한 광장. 보고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그런 광장의 하늘. 




(바르셀로나 구시가 오래된 우체국 건물이 있는 광장2011년 2월, FX36)




그래서 이 글의 카테고리가 Pause로 결정되었다.

Posted by Sophie03
[Pause]2012. 12. 19. 00:48



여행이 결정되면 떠나는 순간까지 가장 고민하는 것이 가져갈 책이다.

지루해서는 안 되고, 너무 짧아서도 안 되고, 여행지 혹은 여행의 목적과도 잘 맞아야 한다. 

올 여름 LA 휴가 때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져갔고, 재작년 겨울 뉴욕 휴가 때는 브리다를 가지고 갔다. 휴가이든 출장이든 여행에는 늘 책이 함께 하고 그 여행의 동행책에 여행의 추억이 깃들여 지곤 한다.


동행책이 중요한 이유는, 워낙 책을 좋아하는 이유 외에도 밤 혹은 새벽에 읽을 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차의 문제도 있지만, 환경이 바뀌면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거나 새벽에 깨버리는 예민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주일 여행 동안 더 많은 독서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래서 빨리 책을 마쳤을 경우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여야 한다.



문제는 일상에서도 종종 쉽게 잠못이루는 날들이 있다.

올해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숙면여행의 행복한 기억이 문득문득 내게로 온다.

숙면여행이라고 해서, 내가 푹 자러 가야지 하고 다짐하고 가서 숙면여행이 아니라, 어느 여행지에서는 정말 자도자도 또 잠이 오는데, 자는 동안에도 깨어 있는 동안에도 몸이 너무 개운해서 기분이 참 좋은 시간을 뜻한다.



행복했던 Top3 숙면여행지를 소개하면서, 오늘밤 숙면을 청해 보려고 한다. 



첫번째 숙면여행지는 니스이다. 

99년 난생 처음의 해외여행은 유럽배낭여행이었고, 첫경험의 여행자가 늘 범하는 쉬운 실수인 "많은 도시를 빨리 돌아보는" 여행 일정으로 인해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니스에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해변에 누워서 대낮 동안 거의 계속 잠을 잤다. 그 해변가는 검은 조약돌이 깔린 해변이라, 태양열이 조약돌을 통해 선베드에 누워 있던 내게 전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태양열-검은 조약돌-해변가- 지중해의 바람이 내게는 자연적인 치유의 순간이었던 듯 싶다. 물론 맥반석의 오징어 처럼 아주 뜨거웠는데, 중요한 것은 나는 숙면을 취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숙면여행지는 선운사이다. 

얼마전 글에서도 썼지만, 이직의 순간에 템플스테이를 떠났고 그 장마빗소리를 들으며 자고 또 잤다. 그냥 민박집 같은 잠자리였는데도 이상하게도 포근한 기운이 나를 계속 잠들게 했었다. 선운산의 기운이었는지 사찰의 정기였는지 혹은 태고적 공기를 품은 바람의 영향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너무 달콤한 숙면의 순간이었다. 물론 동행인에게는 무척 미안했다.



(FX36, 비오는 선운사, 2008.07.01)


(FX36, 비오는 선운사, 2008.07.01)




세번째이자 Top1의 숙면여행지는 인스브룩Innsbruck이다.

인스브룩은 오스트리아의 도시로,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중심지였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황금지붕이 있는 곳이다. 유럽사람들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나의 스위스 엄마(집주인)가 그랬다. 


(스위스 생갈렌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인스브룩으로 가던 고속 도로. 오스트리아로 들어가자 깎은 듯한 알프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고속도로가 나 있었다, 2004.3월초, IXUS400)




3월초 급하게 짐을 챙겨서 떠난 인스브룩 여행은 여러 추억이 있어서 종종 꺼내보는 여행인데, 오늘은 숙면여행이야기 중이니, 그 이야기만 하자면, 그곳에선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 때는 이미 시차적응을 다 하였을 때 였지만, 스위스에서 새벽에 내리는 눈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었고, 문득문득 이상한 향수병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스브룩에서는 잠이 계속 오곤 했다. 자동차를 얻어타고 갔으니 피곤한 여행길도 아니였는데도 자꾸만 잠이 왔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휴양도시라는 것이, 건강한 잠을 허락해 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숙면기념으로 호텔방을 찍어뒀다. 좋아하는 하얀면 이불보가 덮힌 침대, 2004.3월초, IXUS400)




숙면을 취하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 이렇게 달콤하고 즐거운 잠을 자고 있었던 건가? 예민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일인가? 인스브룩에서 잠을 자니 나는 너무도 좋다. 언젠가 너무 피곤하고 지칠 때 다시 돌아와 숙면을 취하고 싶다.


달콤한 오후의 낮잠도 잤고, 평화로운 밤잠도 자고 일어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일행을 기다리지 못 하고 호텔 로비에서 아침을 신나게 먹고 산책을 나갔었다. 인스브룩은 독일어로 인강의 다리라는 뜻으로 도시의 가운데 인강이 흐르고 양옆으로 알프스산맥이 지난다. (쓰다 보니 언젠가 인스브룩 특집 글을 쓰고 싶어진다, 언젠가를 기약하며...)


인강을 따라 아침산책을 나섰다가, 조깅하는 무리를 보고 나도 조깅을 했다. 잘 잤고 잘 먹었고 좋은 공기에서 뛰고 나니 상쾌했다. 그리곤 또다시 커피 한잔 생각에 호텔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또 잤다. 몸에 약이 되는 그런 잠이였다. 



(인강을 따라 조깅하는 무리, 2004.3월초, IXUS400)




그 시간을 생각하니 또 행복해 진다. 서울로 돌아오기 열흘 쯤 전에 우연히 떠났던 여행. 

그리고 그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갑작스런 여행을 제안하시고 나를 픽업해 인스브룩으로 태워가시고, 행복한 여행의 추억을 제공해 주신 분은 사실 올해 초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봄이 느껴지던 순간에 내게 허락되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편안한 휴식 같았던 인스브룩으로의 숙면여행. 

그 휴식만큼의 생동감이 지금까지도 나를 지지해 주고 있는 듯 하다.

Posted by Sophie03
[Pause]2012. 12. 15. 23:49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스트레스 management*이다.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대학교4학년 2학기 때는 응급실에도 갔었다, 스트레스에 의한 위경련으로.

한해두해 시간이 쌓이면서, "휴가"라는 것이 직장인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년에 단 한 번 1주일간의 해외여행로 휴가를 사용하고 난다고 해도 1년치 스트레스를 다 해소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여행이 가고 싶을 때, 바로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그 순간 생각나는 여행사진을 찾아 그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달랜다. 

그래서 사진 한장.



                         

(사진의 주인공은 물론 귀여운 토끼이다)



Stress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스스로 우울한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다시 갤러리를 다니게 된 순간이 있었다. 나는 원래 갤러리를 다니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조차 잊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갤러리 투어는 우울한 터널을 빠져나오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고, "서울관광객놀이"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는 계기를 찾게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의 여행은 늘 둘러보아야 할 갤러리나 미술관을 들리고, 자연을 만끽하며, 공연을 관람하고, 카페나 바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주요한 일정이므로, 서울에서도 그것을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서울관광객놀이"의 방법은 간단하다. 서울에 와서 체류 중이라고 가정을 하면 된다. 

스위스에 가 있을 때, 나는 새벽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거나, 날좋은 날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기 위해 취리히에 다녀오거나, 유람선을 타기 위해 루가노를 다녀오거나,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구경하러 다녀왔었다. 언제나 기차를 타고.


즉, 나는 지금 서울에 와 있다고 가정을 하고, 당일치기 여행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다. 나는 파리에 가도 루브르에 늘 다시 가고, 나는 바르셀로나에 가면 늘 몬세라토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으니까, 두번 또 가도 상관없다. 나는 서울관광객이니까.


서울에 오면, 나는 낙산공원도 가야 하고, 현대미술관에 가서 백남준 비디오아트도 봐야 하고, 리움에 가서 조선백자 달항아리도 봐야 하고, 상수동 카페에도 가야 하고, 남산에 가서 서울야경도 봐야 한다. 그리고 근교도 다녀와야 하니, 기차 타고 춘천도 다녀오면 된다.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그냥 마음속으로 나는 서울에 와 있는데, 이번 체류 기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정하기만 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은근 귀가 얇으므로, 관광객이다, 라고 말해주면, 그런 줄 알고 잘 따라 다니고, 어느 순간 마음이 붕붕붕하고 신나한다. 그리고 일상의 어느 순간, 어느 여행의 순간으로 건너갈 때, 문득문득, 서울관광객놀이할 때의 시간도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장거리 여행의 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중교통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단거리 여행의 묘미도 쏠쏠하다. 




이제 간단히 서울관광객놀이 일화 소개. 


이 사진은 스트레스 management를 제 때 못 해서 힘들어하는 후배와 함께 서울관광객놀이를 알려주려고 나섰던 여행길에 찍은 사진이다.




첫 사진의 토끼가 출몰한 바로 그곳에서 찍은 사진. 

장소는 바로 여의도 공원! 사실 토끼는 관광객의 행운이었다. 나는 다만 하늘과 숲을 보여줄 생각으로 후배를 데리고 여의도공원 산책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토끼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 오후의 하늘.



그날 오후 해지기 직전의 고수부지. 


사실 나는 태양을 포함한 이런 구도의 사진 찍기를 즐겨서 어느 곳에 가든, 혹은 어디 곳에도 가지 않든, 셔터를 누르게 된다. 

아련하게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지, 일요일 오후인지, 이런 생각을 잊게 해 주는 그런 시간들, 서울관광객놀이의 시간들.






* 한글로 글쓰기를 노력중에 있으나, management를 관리라고 하기에는 범위가 좁아 그냥 management로 기재함

* 모든 사진은 갤스1으로 찍었습니다.

Posted by Sophie03
[Pause]2012. 12. 7. 00:38




12월의 겨울은 1월의 겨울보다 언제나 더 춥다. 

온도의 차이보다는 추위에 아직 내성이 생기기 전의 체온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져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2월의 여행은 여느때의 여행보다 변수가 하나 더 있다. 추위.

여행지에서의 추위는 늘 이건 좀 의외인데, 라는 생각의 것들을 선사해 준다.




보통 상상하는 12월의 여행지의 하늘은 이래야 한다. 

흐리거나 어둑하거나, 그래서 여행자로서의 신분을 망각한 채, 연말을 맞이하는 일상의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다.



           (2010.12.7 taken by iPod Touch. 뉴욕 센트럴파크)


               


          (2010.12.7 taken by iPod Touch. 뉴욕 센트럴파크)





하지만 눈/비가 오지 않는 한 12월의 여행지에서 자주 만나는 하늘은 이런 경우가 잦다. 

춥기 때문에 쨍하게 맑은 하늘. 추울까봐 12월에 여행을 가지 않을 이유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하늘. 

다들 출근하는 도시에서 여행자처럼 거리를 걸어다니는 여행지의 오전의 여유로움. 

그래서 카페에 앉아 유유자적하거나, 그림 하나에 집중하다가 긴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여행자만의 시간을 살아내게 된다.




         (2010.12.8 taken by iPod Touch.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가는 길)


         


12월의 여행이 특별히 재미난 것은, 일상의 pause 버튼이 확실히 눌러진다는 데에 있다. 

일상에서 정확히 분리되어 나와, pause 상태의 본인을 마주함과 동시에 

지나온 일년간의 시간과도 쉽게 마주하게 된다. 

송년회의 시간을 통하지 않고, 쨍하게 맑은 하늘을 마주하며, 지난 일년을 정리하게 된다.




나는 사실 추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 특히 한 해의 첫 추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한다.

그러니 내가 12월의 여행을 달가워 할리 없다.



그렇지만, 12월 여행의 묘미는 분명하다. 첫추위를 여행지에서 맞이하며, 더 쉽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렇기에, 여름에도 겨울에도 정신을 차리기 힘든 버거운 순간이 찾아올 때, 12월의 여행을 떠올린다.

그곳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12월의 쨍하게 맑은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12월 여행의 묘미는 분명하다. 





 # 추워서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 음악을 듣던 채로 iPod Touch로 찍은 사진들임


Posted by Sophie03
[Pause]2012. 11. 30. 22:00

길을 걷다 문득, 일을 하다 문득, 밥을 먹다 문득,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낯설고도 익숙한 곳에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된다.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댓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이 구절을 읽고 120%라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현실에서 괴리되는 순간, 나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여행의 순간으로 건너가 있으니까.





심적으로 힘겨운 늦은 초겨울밤, 

서울역의 차가운 공기는, 어느새 나를 2004년 2월의 취리히에 존재하게 했다.

그날 자정에 취리히에서 피렌체로 가기 위해 야간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빠듯하게 시간을 맞춰 생갈렌 나의 집에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저녁을 먹다가 문득, 

보름달이 뜬 취리히의 밤거리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에 후다닥 뛰쳐나갔었다. 

아름다웠던 거리, 청량하게 콧끝시린 공기가 기억난다. 물론, 취리히 역의 차가운 온도와 이후의 피렌체도.




                                          (IXUS400, Feb 2004, Zurich) 상단 가운데의 하얀 구체가 보름달!

                   


그래서 나만의 언어로 여행을 정의하자면, 


"모든 여행은 pause이다. 

exit이 없는 현실에서 잠시잠깐 pause 버튼을 누르고 다른 시공간에 스스로를 데려다 놓는 것.


중요한 것은, 15초짜리 짧은 pause가 종종 일어난다는 것.

나의 두 발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나의 눈은 이미 낯설고도 익숙한 곳의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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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4 여행작가의 책무
 
모든 여행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의 반댓말은 비현실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작가는 그렇게 믿어야 하며,
여행작가의 가장 소중한 책무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독자를
피신시키는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지평선 너머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커다란 배낭을 지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지편선을 넘어가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잘 지내나요 내인생

저자
최갑수 지음
출판사
나무수 | 2010-11-2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을 확실하게 아는 나이 서른과...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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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