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013. 9. 3. 23:35


항상심 恒常 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때가 벌써 15년 전이다. 살면서 항상심을 가지는 이야기였는데, 당시에 내가 이해한 바로는 삶이라는 큰 그림을 두고 보면 순간순간 일희일비하지 말고 항상심을 유지하라는 이야기였다. 이십대 초반의 내게는 사실 관념적인 이야기였다.


항상심이란 단어를 내가 입 밖에 낸 것도 벌써 10년전이다. 가톨릭신자인 나는 20대 시절에 가톨릭청년성서모임을 통해 성서공부도 하고 봉사도 하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항상심이라는 단어를 접했던 때도 마르코 연수생이었던 때고, 말했을 때는 창세기 연수 봉사자였을 때였다. 연수 마지막 날에 나는 이런 내용의 말을 했었다.


"삶으로 돌아가 3박4일의 연수를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우리 모두를, 이 시간들을 전부 잊게 되실 겁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삶에 돌아가 일상을 살아내십시오. 항상심을 가지고 삶을 살다가, 어느날 삶이, 감정이 소용돌이칠 때, 불현듯 마음 속의 기억들이 살아나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조차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이 잔인하다는 것쯤 나도 알고 있다. 헤어짐도 잊혀짐도 쉽지 않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어릴 적에 전학을 다녔던 내가 경험으로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의 위치가 바뀌더라도, 삶의 상황의 바뀌더라도 살아 있는 한 삶이 지속된다. 삶의 시간에 매달려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한들 과거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다. 현재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써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삶 이외의 것에서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고 위로를 찾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이다. 삶에 대한 대책은 삶 안에 있다. 문제를 직면하거나 자아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을 뿐, 실제로 삶에 그 대책이 있고,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 알고 있다. 다만 그 시간들이 가져올 폭풍우가 두려워 삶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삶이 휘청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생각치 못한 따사로움에 항상심의 상태로 돌아올 수는 있게 된다. 삶 이외의 것이 아니라, 삶 내부에 있는, 과거에 존재했거나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위로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 된 나의 경험이다.


삶이 너무나도 고달펐던 어느 때에, 지금 돌이켜 보면 온통 검고 어둡고 습한 기운만 느껴지던 그 때에 이대로 삶이 중단되어지기를 강렬하게 바란 적이 있다.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응축된 에너지로 그 일이 내게 당장 일어나기를 희망했던 순간이었다. 


그 때 우습게도 내게 떠오르는 것은 항상심이라는 단어였다. 그리고 항상심이란 단어는 내가 저 단어를 내뱉었던 순간을 동반해서 내게 왔다. 

"내가 항상심을 이야기 했으니, 감정이 소용돌이쳐서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이 때에도 나는 항상심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연수생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으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와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머리로 이해하고 있던 항상심은 "굉장히 따사롭고 평화로운, 혹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과 짝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 순간에 그런 순간들을 떠올렸어야 맞다. 그런데 내게 항상심은 항상심이란 단어 그 자체와 짝이었고, 약속이라는 단어와 짝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심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이십대 초반부터 "항상심을 살아야지"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세웠던 것이다. 항상심을 사는 것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나의 숙제이며 동시에 위로로 작용해 왔으니, 나의 위기의 순간에 '항상심'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