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깨곤 다시 잠들지 못 하고 있다. 회사 업무도 해야 하지만, 나의 시간으로 쓰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글로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아니면 글을 쓰기 어려우니까. 지난 번에 작성하다가 날라가 내용만 적어둔 글도 결국 새벽에 쓴 글이고, 그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글이다.
딸 11개월에 복직하고, 18개월이 흘렀다. 아슬아슬하게 일어서던 딸은 걷고 뛰고, 단어에서 문장을 말하고, 잘 웃고 자의식도 생겨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섭섭한 것도 생겼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의 주체가 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다.
반면 나는 수분도 기름도 빠져버린 사람처럼 생기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주 4회 운동하던 나는 하루 만보 걷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밀가루 단식을 하던 나는 어떻게라도 끼니를 떼워야 했고, 일년에 책 70권을 보던 나는 일년에 책 10권을 겨우 읽은 듯 하고, 한 때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였던 나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언젠가 회사 지인이 "너와 써니처럼 블링블링 빛나는 존재들은 결혼하지 않고 계속 반짝반짝 빛나줬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의 육아와 가정의 병행이 문제였던 것이다. 엄마도 아닌, 회사원도 아닌, 가정의 구성원도 아닌, 그냥 존재 자체로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던 셈이다.
늘 바쁘고 늘 힘들고 늘 버거운 그런 시간 속에 놓여져, 시간을 살아내지 못 하고 끌려만 가고 있으니,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하기 어렵고 당연히 생기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각성시킨 것은, 2017년말에, 10분 정도 시간이 나는데 잠깐 볼까?하고 연락온 오래된 지인의 한 마디 때문이다. 둘다 회사원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터놓고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인데, 오랜만에 보자마자 한 말. "귀걸이도 좀 하고"
맞다, 귀걸이도 안 했다. 화장도 안 했고, 출산과 함께 불어난 몸무게는 아직 그대로라, 내 인생 최대 몸무게인(임신 시절 제외) 고등학교 3학년 떄 몸무게와 같다. 오랫동안 등산과 요가로 군살없던 몸매로 입을 수 있던 옷들은 디자인도 사이즈도 안 맞아 못 잊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나는 살고 있었다.
10대의 나를, 20대의 나를, 30대의 나를 기억하는 나의 친구는 여전히 그 때의 반짝반짝 빛나던 과거의 나를 내게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친구가 그 10분의 시간동안의 만남동안 나에게 2018년 KPI 따위 던져줄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우리의 대화는 늘 휴대폰에서 시작해 휴대폰으로 끝난다. 오래된 친구만의, 오랜만에 만나도 안부 따위 묻고 그런 일 없이, 그냥 툭툭툭 대화하다가 미련없이 일어나는 그런 사이니까.
그런데 나는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그랬다. 아, 맞다.
유사한 때의 어느 날, 나를 블링블링하다고 말했던 그 회사 지인이, 2017년초 면팀이 되고, 조직 이슈가 있었고, 기타 등등의 일들을 겪으며 2017년을 보냈는데, "돌아보니 내게 어떻더라", "지금 나의 고민은 뭐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의 관심사는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제넘게 했었다. 첫번째 직업인 회사원 삶을 은퇴한 이후의 두번째 직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지금 우리는 해야 한다고 그런 대화를, 써니와 함께 셋이 종종 했다. 그로부터 시일이 흐르고, 그 회사 지인은 "나는 OOO을 하기도 했고, 이미 시작했노라"고 이야기 했다.
그 점심식사를 마친 이후 나는, 최근의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내가 어땠노라 충고하였고, 그 회사 지인은 4살 어린 나의 그 충고를 받아들여 무언가 행동에 옮겼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왕년의 내가 이랬노라" 이야기 하는 꼰대였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딸은 반짝반짝 빛나는 주체가 되고 있고,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200% 갈구하던 아기 시절을 넘어, 때로 홀로 책을 보기도 하고, 놀기도 한다. 조만간 홀로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고, 자연스레 내 품을 떠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순수하게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던 시기가 아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끝나간다.
그런데 나는 기초대사량이 떨어진 채로, 생기 없는 모습으로, 에너지원이 내부에 있는 사람인데, 그 내부를 마주할 여유나 마음이 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 나를 탓하거나 채찍질할 생각은 없다. 침잠하는 시간, 내가 나를 놓치는 시간이 언제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러 시그널이 나를 두들겨 깨우는 것이다.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너다운 너"가 아닌, 내가 내게서 알아내는 "나다운 나"로 살아가야 한다고, 내 주변 많은 것들이 나를 일깨우고 있다.
그러고 보니, 10년이다. 깊은 우울에서 빠져나와, 다시 생기발랄한 나로 돌아온 그 때가 2008년이었다. 그 해에 나는 다시, 운동을 하고, 이직을 했고, 선운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했고,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고, 만 서른 살이 되었다. 삶이 즐거워졌고, 좋아하던 와인을 공부하게 되었고, 다시 책을 일년에 70권씩 읽었다.
이번에 나는 어떤 2018년을 보내게 될까? 올해는 만 마흔이 되고, 입사 10주년이 된다는 점만 정해져 있다. (회사의 일들도 정해져 있다) 그 외의 대부분의 것들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운동을 하고 다시 책을 읽고 다시 생기있는 존재가 되는 일이, 10년전과는 다른 상황에서 manage해야 하지만, 그래도 시작은 나다. 세부적인 KPI야 나의 다이어리에 적어두기로 하고, 너다운 너가 아니라, 나다운 나로 사는 것, 그래서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 2018년 나의 목표이다.
* 그래서 1월 첫 출근일부터 매일 화장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옷도 fit되게 입고 출근했다. 인스타에도 이런 메세지를 남겼더니, 뭐지, 이런 좋아요는 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