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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19 [Sophie' Pause] 숙면여행
[Pause]2012. 12. 19. 00:48



여행이 결정되면 떠나는 순간까지 가장 고민하는 것이 가져갈 책이다.

지루해서는 안 되고, 너무 짧아서도 안 되고, 여행지 혹은 여행의 목적과도 잘 맞아야 한다. 

올 여름 LA 휴가 때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져갔고, 재작년 겨울 뉴욕 휴가 때는 브리다를 가지고 갔다. 휴가이든 출장이든 여행에는 늘 책이 함께 하고 그 여행의 동행책에 여행의 추억이 깃들여 지곤 한다.


동행책이 중요한 이유는, 워낙 책을 좋아하는 이유 외에도 밤 혹은 새벽에 읽을 거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차의 문제도 있지만, 환경이 바뀌면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거나 새벽에 깨버리는 예민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주일 여행 동안 더 많은 독서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래서 빨리 책을 마쳤을 경우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여야 한다.



문제는 일상에서도 종종 쉽게 잠못이루는 날들이 있다.

올해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숙면여행의 행복한 기억이 문득문득 내게로 온다.

숙면여행이라고 해서, 내가 푹 자러 가야지 하고 다짐하고 가서 숙면여행이 아니라, 어느 여행지에서는 정말 자도자도 또 잠이 오는데, 자는 동안에도 깨어 있는 동안에도 몸이 너무 개운해서 기분이 참 좋은 시간을 뜻한다.



행복했던 Top3 숙면여행지를 소개하면서, 오늘밤 숙면을 청해 보려고 한다. 



첫번째 숙면여행지는 니스이다. 

99년 난생 처음의 해외여행은 유럽배낭여행이었고, 첫경험의 여행자가 늘 범하는 쉬운 실수인 "많은 도시를 빨리 돌아보는" 여행 일정으로 인해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니스에 왔는데 너무 피곤해서 해변에 누워서 대낮 동안 거의 계속 잠을 잤다. 그 해변가는 검은 조약돌이 깔린 해변이라, 태양열이 조약돌을 통해 선베드에 누워 있던 내게 전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태양열-검은 조약돌-해변가- 지중해의 바람이 내게는 자연적인 치유의 순간이었던 듯 싶다. 물론 맥반석의 오징어 처럼 아주 뜨거웠는데, 중요한 것은 나는 숙면을 취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숙면여행지는 선운사이다. 

얼마전 글에서도 썼지만, 이직의 순간에 템플스테이를 떠났고 그 장마빗소리를 들으며 자고 또 잤다. 그냥 민박집 같은 잠자리였는데도 이상하게도 포근한 기운이 나를 계속 잠들게 했었다. 선운산의 기운이었는지 사찰의 정기였는지 혹은 태고적 공기를 품은 바람의 영향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너무 달콤한 숙면의 순간이었다. 물론 동행인에게는 무척 미안했다.



(FX36, 비오는 선운사, 2008.07.01)


(FX36, 비오는 선운사, 2008.07.01)




세번째이자 Top1의 숙면여행지는 인스브룩Innsbruck이다.

인스브룩은 오스트리아의 도시로,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중심지였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황금지붕이 있는 곳이다. 유럽사람들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나의 스위스 엄마(집주인)가 그랬다. 


(스위스 생갈렌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인스브룩으로 가던 고속 도로. 오스트리아로 들어가자 깎은 듯한 알프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고속도로가 나 있었다, 2004.3월초, IXUS400)




3월초 급하게 짐을 챙겨서 떠난 인스브룩 여행은 여러 추억이 있어서 종종 꺼내보는 여행인데, 오늘은 숙면여행이야기 중이니, 그 이야기만 하자면, 그곳에선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 때는 이미 시차적응을 다 하였을 때 였지만, 스위스에서 새벽에 내리는 눈소리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었고, 문득문득 이상한 향수병에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스브룩에서는 잠이 계속 오곤 했다. 자동차를 얻어타고 갔으니 피곤한 여행길도 아니였는데도 자꾸만 잠이 왔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휴양도시라는 것이, 건강한 잠을 허락해 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숙면기념으로 호텔방을 찍어뒀다. 좋아하는 하얀면 이불보가 덮힌 침대, 2004.3월초, IXUS400)




숙면을 취하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 이렇게 달콤하고 즐거운 잠을 자고 있었던 건가? 예민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일인가? 인스브룩에서 잠을 자니 나는 너무도 좋다. 언젠가 너무 피곤하고 지칠 때 다시 돌아와 숙면을 취하고 싶다.


달콤한 오후의 낮잠도 잤고, 평화로운 밤잠도 자고 일어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일행을 기다리지 못 하고 호텔 로비에서 아침을 신나게 먹고 산책을 나갔었다. 인스브룩은 독일어로 인강의 다리라는 뜻으로 도시의 가운데 인강이 흐르고 양옆으로 알프스산맥이 지난다. (쓰다 보니 언젠가 인스브룩 특집 글을 쓰고 싶어진다, 언젠가를 기약하며...)


인강을 따라 아침산책을 나섰다가, 조깅하는 무리를 보고 나도 조깅을 했다. 잘 잤고 잘 먹었고 좋은 공기에서 뛰고 나니 상쾌했다. 그리곤 또다시 커피 한잔 생각에 호텔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또 잤다. 몸에 약이 되는 그런 잠이였다. 



(인강을 따라 조깅하는 무리, 2004.3월초, IXUS400)




그 시간을 생각하니 또 행복해 진다. 서울로 돌아오기 열흘 쯤 전에 우연히 떠났던 여행. 

그리고 그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갑작스런 여행을 제안하시고 나를 픽업해 인스브룩으로 태워가시고, 행복한 여행의 추억을 제공해 주신 분은 사실 올해 초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봄이 느껴지던 순간에 내게 허락되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편안한 휴식 같았던 인스브룩으로의 숙면여행. 

그 휴식만큼의 생동감이 지금까지도 나를 지지해 주고 있는 듯 하다.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