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013. 2. 22. 23:26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그리라는 주문을 받았을 때, 산중턱의 길들이 전혀 감이 안 와서 검은 구름으로 칠해두었었다. 나는 산 아래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르기는 하겠지만, 가는 길은 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니, 지금은 알 수 없어서 그랬었다. 실제로 등산을 하다 보면 당연히 산 중간의 길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그저 산의 전체적인 모습 뿐이다. 산에 들어가서 걸어봐야 오솔길인지 바위길인지 알 수 있고, 어떤 바람이 부는지, 어떤 새가 지저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중간 즈음의 정자와 쉼터 그리고 아이스크림 아저씨를 만나는 행운도 역시 산을 실제로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저 그림은 대학생 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먹구름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강했던 시절에 그렸었는데, 어떤 계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모르면 뭐 어때, 그냥 주저 앉아 있어야지.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저 그 목표만 가지고 살면 되었다. (사실 그 때 무엇이 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게는 그런 행운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그 때는 간단한 산을 오르면 그만, 당연히 가는 길도 명확했다. 그런데 대학생 때는 다르니까, 목표가 없어지니까, 먹구름에 갇혀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저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벤치에서. 그렇지만 나는 범생이니까, 이런 생각을 덧붙였었다.



그냥 주저 앉아 있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일어서서 걸어야지. 이런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63빌딩을 오른쪽에 두고 벤치에 앉아, 정면으로 보이는 시범아파트 어느 집 창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도 난다. 큰 놀이터였는데도 나는 정말 산길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그렇게 멍해져 있다가, 든 생각이었다. 때가 되면 나도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냥 주저 앉아 있자고,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져서 일어나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니니까, 스스로를 재촉하지 말자고, 그런 생각이 했었다.


그리고 어느 계기에 일어나서 어떻게 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에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가고 있었고 어느 순간에 나는 길에서 헤매이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에 나는 또 주저 앉아 있었다. 시범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저 생각을 한지 꽤 오래 지났는데 나는 계속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면 나는 생각한다, 



나는 큰 구덩이에 빠진 게 아니다, 어느 순간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는 큰 놀이터에서 길을 잃은 거다. 그러니 일단 주저 앉아서 땅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를 가지고 놀다 보면 어느 순간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찾을 수 있을 거다. 그 때 머뭇거리지 않고 그냥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면 된다. 



주변에 상황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는 지인들에게도 이 말을 해 주게 된다. 동백씨의 말처럼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으니 주저앉고 싶은 본인을 발견하거든 그냥 스리슬쩍 앉아버리라고...



내가 해 보니 괜찮더라고, 그저 일단 주저 앉아서 모래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일어나서 걸어가고 싶은 방향이 보인다고, 방향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일어난 용기가 생긴다고, 그러니 어느 순간 일어나서 걸어갈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고. 당장 방향을 잡지 않는다고, 성큼성큼 걸어가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탓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해줄 때는 나도 위로받는다. 최근에 이 이야기를 해 주다가 생각했다, 이제 2013년을 맞아 가만히 서 있었으니, New Year's Resolutions를 정해 조금씩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1월1일이 아니라, 설날에 혹은 3월 내 생일에 New Year's Resolutions를 완성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이 내가 1년동안 계획을 잘 지키는 이유이다, 길게 생각하기도 하고, 1~2달의 beta-test기간을 거치니까. 올해의 나도 또 어느 만큼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올해는 작년만큼의 깔딱고개를 만나지 않기를, 올해는 아이스크림 아저씨를 만나는 행운을 가지게 되기를 살짝 바라면서!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