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2014. 4. 22. 23:50
배용준과 전도연이 젊디 젊던 시절, 두 사람이 함께 나왔던 단막극이 있다. KBS 단막극 "이별하는 여섯 단계"라는 제목이고, 배용준이 의사이고 전도연이 실연한 여자였다. 전도연의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배용준이 방법을 제시하고 그걸 시행하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러다가 배용준과 전도연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해피엔딩 구조였다. 그 실연을 극복하는 중에 전도연이 실연한 애인과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질리도록 먹도록 하는 장면이 있다. 왠일인지 나는 가끔씩 그 장면을 떠올린다.
최근에 또 이 드라마 장면을 떠올렸다. 잊고 싶은 기억,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 내게는 인재가 그것이고, 반복이 되어도 절대 잊을 수 없다. 혹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0월이 되면 성수대교 붕괴 20년이 된다. 20년이나 흘렀지만 나는 10월이면 그날을 생각한다. 스쿨버스를 타고 7시가 되기 전에 성수대교를 지났다. 그로부터 40여분후 성수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날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동호대교로 루트를 변경한 스쿨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환히 밝혀진 사고현장을 두눈으로 보았다. 이후로도 내내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저렸다.
나의 행운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불운도 아니었다. 철저히 인재에 의한 사고, '확률'이라는 우연에 의해 나는 지나갔고, 누군가는 생을 달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10월을 지나가겠지만,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그들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확률에 의한 우연이라니 너무 잔인하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붕괴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장마철에 감전되며, 간판이 떨어지기도 하고, 리조트 강당이 무너지기도 한다.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가 아닌 인재,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누군가가 아니라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재난이다.
누군가는 내게 "왜 네가 트라우마를 가져?"라고 하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같은 트라우마는 남는다. 매일 등하교하며 다니던 성수대교, 나의 의지도 나의 행운도 아니었지만, 나는 살아 남았고 생을 계속 하고 있다. 그리고 인재는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당연히 생존자들에게도 남을 것이다. 소극적인 우연에 의한 나에 비해, 그들에게 훨씬 큰 트라우마가 남을 것이다.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질리도록 먹는다고 해소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재가 반복되지 않아야, 살아남은 자들이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로보다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 최근에 이런저런 주제로 써달라는 글을 쓰고는 다듬고 있었는데, 그 글들을 올리기에는 죄의식이 생겨서 한동안 나는 또 글을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Life has got to go on"('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읽을 때는 내가 이 구절을 이렇게 인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에 몸을 숨기고, 또 나의 삶을 살아가게 될테지. 20년동안 계속 그래왔듯이... 그래도 여전히 나는 성수대교를 건너는 것이 너무 두렵다...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