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끊기]2014. 2. 11. 00:22

2014년 2월 10일로 밀가루를 끊은지 1년이 되었다. 오늘은 퇴근 후 요가를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런 낯간지러운 일주년 글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업무 때문에 퇴근을 제 때 못 했고, 덕분에 나의 책상에 앉아 오랜만에 하릴없이 글을 쓰기로 했다. 1년의 기록을 또 작성하기에는 그동안 "밀가루 끊기"라는 이야기로 주절주절 해 왔으므로, 최근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리해 볼까 한다.

 

(1) 밀가루를 끊으면 좋은가?

 

밀가루를 끊으면 좋다.

육체적인 측면에서 몸이 가벼워진다. 소화가 안 되는 경우가 드물고, 나의 경우에는 요가와 운동과 금주가 맞물려 장기간 동안 조금씩 날씬해지고 있다. 삼십대 중·후반에 들어서니 몇 끼 굶는다고 살이 빠지지 않고 오히려 몸이 붓게 됨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밀가루를 끊으니 장기간에 거친 식이조절을 하게 된 셈이기 때문에, 살이 빠지게 된다.

미각적인 측면에서 기본에 충실하게 된다. 내가 정말 모든 밀가루를 끊고, 한 입도 안 먹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나와 식사를 해 보면, 버터가 먹고 싶어서 정방형 1cm 가량의 빵에 버터를 가득 발라서 먹는다던가, 7블레스에서 유기농피타브레드에 후무스를 얹어서 먹는다거나, 튀김옷을 벗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튀김옷을 먹는다던가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먹어도 더 먹고 싶다거나, 즐겁다거나 하지 않고, 기름진 튀김옷 따위 먹고 싶지 않다며 은근 슬쩍 뱉어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튀김옷 사이에 있는 새우이지, 튀김옷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튀김 자체에 대한 매력이 저하되어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길거리 불량식품인 수제핫도그를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냥 별로 먹고 싶지 않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소 충격에 휩싸였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의례히 내가 좋아해왔노라고 생각해온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냥 섭취하는 습관이었지, 꼭 좋아한 것은 아니었었다. 그래서 최근에 새우깡도 두어개 먹었고, 바나나킥도 두어개 먹었는데, 한 개 먹을 때는 왠지 만족스러웠는데 두 개째는 그냥 그랬다. 그래서 한 봉지를 다 먹을 수 있었던 과거의 나는, "한봉지를 다 먹는다"는 생각을 좋아한 것인지 실제로 과자를 한 봉지 다 먹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삶이라는 것이 늘 내가 주체라고 생각해도, 한겹한겹 벗겨보면 습관에 의해 굴러가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나는 밀가루를 끊고야 눈치챘다.

 

(2) 밀가루를 먹고 싶지는 않은가?

 

일년쯤 지나니 딱히 먹고 싶지 않다. 짜파게티를 보거나 짜장면을 보면 조건반사처럼 코를 킁킁하게 되지만, 예를 들어, 몇달전 이태원 썬더버거에서 동생이 맛나게 버거를 먹는 것을 보고 한입 먹어볼까 생각해 봤지만, 실제로/정말로 먹을까 생각하면 별로 먹고 싶지 않다. 3월 내 생일이 다가오는데, 내 생일에 어떤 음식을 먹을까 생각해 보면 실제로 밀가루가 상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적다. 먹는다 해도 한 입쯤, 음, 그렇지 이런 맛이었구나! 생각할 정도만 먹을 것이다. 알고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3) 밀가루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나는 그냥 딱 끊었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일년 동안 종종 "밀가루 끊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왔으니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지만 밀가루를 뚝 끊어버리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밀가루를 끊기 시작했다. 아직 100퍼센트 끊은 사람은 없지만, 본인이 너무도 좋아하는 빵을 끊는다거나 면을 끊는다거나 한 가지만 끊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50퍼센트를 끊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고, 나는 그런 방법을 권해 주고 싶다. 나는 나의 unique함이 단식/중단의 상실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데서 나타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이럴 경우에 반작용에 의해서 더 많이, 더 빠르게 욕구를 채운다고 하니, 100퍼센트를 한 번에 끊는 방법은 반대한다. 다만,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고, 없이도 살 수 있음에 대해 체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내게 커피가 그런 존재이다. 나는 심적으로 커피에 많이 의존하고 가끔 극적으로 커피를 중단하는 데 성공하긴 하지만, 또 다시 생각한다. 나는 대체로 금주하고 밀가루단식도 하는데 커피 정도는 마셔줘야 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면 다시 커피를 마신다. 세상 살면서 너무 억울한 일이 많으면 안 되고, 나의 경우에는 커피에서 그런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4) 밀가루 끊기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우선 끼니를 떼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빵을 먹을 수도, 초코파이를 먹을 수도, 칼로리 발란스를 먹을 수도 없다. 초콜렛 중에서도 트윅스는 먹을 수 없고, 어묵을 먹을 수도 없고, 밀가루 떡볶이도 먹을 수 없다. (밀가루 떡볶이의 대표주자 애플하우스는 1년 사이에 네번정도 갔고, 그 외에도 국대떡볶이 두번 등등 가끔 밀가루 떡볶이를 섭취하므로 예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긴 하고, 어묵의 경우에는 맛이 없었다, 일년만에 한 입 먹었는데, 맛이 없어서 더 먹고 싶지가 않았다)

삶은 계란을 준비하거나, 고구마나 감자를 준비해야 하고 최근 한두달 사이에는 스니커즈 미니 사이즈 혹은 펀 사이즈를 한 두개 가지고 다니며 허기질 때 먹는다. 그도저도 아닐 때는 고구마 말랭이를 사 먹거나, 건조 야채나 과일을 사 먹는다. 스니커즈만 빼고 정성이 필요하거나 돈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스트레스 요소로 작용한다. 아직도 밀가루 안 먹어? 그럼 뭐 먹어? 이런 질문은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 필수적 질문이다. 응, 여전히 안 먹지만, 파스타 집에 가도 난 샐러드를 먹으면 되니까 걱정하지마! 이런 말이 잘 안 통한다. 무언가 제대로된 밥을 안 먹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다.

 

일년동안 밀가루를 끊어보니 생각보다 많이, 나는 괜찮다. 무언가 어마어마하게 기특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군가 건강을 위해 물을 1리터 이상씩 매일 마시거나, 야채를 많이 먹는 것처럼, 나도 밀가루를 안 먹고 사는 것 뿐이다.

 

그래도 1년이 되었다고 기념글을 남기는 걸 보면, 여전히 밀가루를 끊은 스스로를 대견하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먹고 싶은 밀가루음식은... 통호밀빵으로 내가 만든 프렌치 토스트!

Posted by Sophie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