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otation]2013. 8. 23. 06:30



오래된 친한 지인들과의 약속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있는 날들이 있다. 사실 연속적인 약속은 피하는 편이지만, 다 사연이 있는 약속들이라, 어느 하나 취소하거나 불참할 수 없어 차례차례 참석했다. 그런데 그 줄줄이 사탕 중 어느 모임에서는 나는 상처받았고, 어느 시간에서는 나는 이야기했고, 어느 시간에서는 훗훗훗 하며 웃었다. 그 줄줄이 사탕 이야기 시작. 

나는 왜 상처받았는가? 사실 딱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어느사이엔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나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 너는 잘 살고 있으니까, 너는 삶이 편하니까, 너는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너는, 너는, 너는! 어디선가는 나도 나의 이야기를 하고, 나도 힘든 구석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작은 틈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귀기울이기에는 다들 자기 삶이 바빴다. 그래서 들어주는 누군가가 내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당나귀귀는 임금님귀"에 대한 희망을 내게 강요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나의 삶이 괜찮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으므로 말이다. 

그날도 "나는 요즘 이렇고, 그래서 저렇다"라는 근황을 두 문장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 두 문장을 말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나도, 나도, 나도 할 말이 있다고, 나에게 가지고 있는 "너다운 것"은 당신들의 희망사항이지 나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나의 본 모습을 봐줄 생각도 나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생각도 없다면, 이제 당신들은 나의 오래된 지인이지, 친한 지인이 아니라고. 나의 온 마음과 나의 온 몸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 나는 사실, 그 두 문장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나의 근황토크라는 것이 뭐 별 게 있겠는가? 나는 꼬물거리는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도 아니고, 활화산이었다가 휴화산이었다 하는 실시간성 트러블메이커인 시댁을 가진 며느리도 아니고, 그냥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니까.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에 상응하는 특별함이 없으므로 나에게 들을 이야기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하늘과 같지만 나는 그냥 흙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이야기는 의미없이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또 그렇기에 나의 이야기는 길어지지 않는다. 그냥 두 문장만 하면 되었다. "나는 조만간 칠순인 어머니를 모시고 가을에 여행을 갈 예정이야, 그래서 비행기에도 숙소에도 돈이 많이 들어서 요즘 가난해." 이 두 문장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나의 특성상 이 두 문장만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텐데, 나의 두 문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아 그렇구나, 너는 어머니와 여행할 예정이라 돈이 많이 드는구나" 이 두 문장이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랬으면 여전히 나의 오래된 친한 지인이었을 것이다. 나를 안다면 내가 더 이상 어떤 어리광도 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 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다음에 만난 나의 오래된 지인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며, "아마도 나는 무한도전(270회) 무한상사편에 나오듯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런 바람조차 잘못인 것 같았다"고 하니, 그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하다. 

내가 그간의 성과를 보다가 "이부분들은 잘 안 되었지만, 이 부분이 개선되었다니 희망은 있어 보이네요" 라고 말을 했는데, 한 직원이 눈물을 흘렸어. 모두가 안 된다고 잘 못 했다고 해서 기 죽은 채 직장생활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개선된 한 부분을 이야기 해 주자 울컥한 것 같아. 아마도 그 직원에게 "이 부분이 개선되었다니"는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네. 

Facebook에서는 like를 누르고, 싸이월드에서는 공감을 누르고, Instagram에서는 하트를 누르지만, 정작 우리의 진짜 삶에서는 "공감"에 인색하다. 승자가 없이 패자만 그득한 세상에서 타인에게 공감하기에는 개인의 상처들이 많고, 모두의 삶은 고단하다. 각자의 삶은 누구에게나 치열하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 다만 공감할 수 있다. 마음 속 깊이 "그래도 나의 삶보다는 너의 삶이 더 좋다"라는 생각이 들지라도, 혹은 그 반대의 생각이 들지라도, 적어도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정도의 공감을 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에게 요구하는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는 들어줄 누군가, 고개 끄덕여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그렇겠네, 힘들었겠네" 정도의 공감이면 끝나는 역할이다. 내가 특별히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 내게도 그저 "아, 그렇구나" 정도만 해 줘도 고마웠을 것이다. 승자와 패자의 세상이 아닌, 지인과 이웃의 세상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가장 단순한 문장은 아마도 "아, 그렇구나"일테니까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무한도전 270회를 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니, 결국 서로 이해는 안 되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지만, 그래도 저 말이라도 해 주니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삶이 이해와 오해의 연속이면 그나마 다행아닌가? 물리적 단절이든 정서적 단절이든, 단절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닌가.

Posted by Sophie03